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26) 쥐도 들 구멍 날 구멍이 있다 

* 쥥이: ‘쥐’의 제주방언 (‘중이’라고도 함)
* 꿈: 구멍의 제주방언 (고어는 굵[穴])
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굼기 잇느니라 (‘춘향전’)

무슨 일을 하든지, 나중을 생각하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너구리도 들 굼기 날 굼기를 판다'라 했다.

쥐도 날 구멍이 있고 들 구멍이 따로 있다. 언즉시야(言則是也)라, 아무리 협착한 공간이라도 나고 들어갈 구멍(길)을 파 놓아야 한다. 쥐는 경계심이 강하고 약삭빠른 녀석임에랴. 비상시를 대비해 으레 들 구멍, 날 구멍을 파 놓는다. 그래 놔야 들쑥날쑥 할 수 있는 법이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그러니까 경험과 본능의 합작품이라 할 만하다. 영악한 짐승이다.

쥐란 놈은 원래 구멍을 이용하는 습성이 있어 집 안에 들어올 때도 수채 구멍 따위를 이용한다. 더욱이 허름한 벽은 안성맞춤이다. 

고양이가 출현하는 날엔, 피하고 은신하기로 구멍 이상이 없다. 고양이는 몸집이 커 구멍 앞에선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한다. 비상시 천적인 고양이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드는 구멍’과 ‘나는 구멍’을 파 놓는 것이다. 자연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계다.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지키는 수밖에 없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몇 년 동안 창궐해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들, 집 울타리 너머 아파트 신축공사가 한창이라 아랫동네로 옮아갔다. 놀라 집단 이주한 모양이다. 쥐 구경한 지가 몇 년이 됐는데, 엊그제 오랜 만에 쥐가 나타났다. 전보다 더 약삭빠르다. 새까만 놈이 화단가에서 눈을 번뜩이더니 삽시에 문간 수도 계량기가 있는 뚜껑 틈으로 들어간다. 제가 낸 구멍이 아닌데, ‘구멍 찾아’ 비상 대피한 것이다. 

들 구멍은 있되 날 구멍은 없다. 

이야말로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다. 때려잡자고 맘먹어 장비 한 번 휘두르면 끝장 날 판이다. 한데 하도 오랜만에 본 놈이라 손이 가지 않았다. 이전에 끈끈이에 몇 마리씩 달라붙어 찍찍대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해 살려 주기로 했다. 녀석에게 관대하게도 됐다. 철새와 야생 진드기가 악역으로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데도, 근래에 쥐가 몹쓸 병을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떠오른 적이 없지 않나.

공사가 연말까지 갈 모양이고 또 공기(工期)가 끝나더라도 워낙 규모가 큰 단지라 예전같이 고양이가 들락거리지는 않을 테다. 대신 쥐가 활동 영역을 넓힐 것이 불 보듯 한 일. 장차, 사냥할 방도를 궁리해야 하게 생겼다.
  
비록 짐승의 얘기지만 한 쪽 귀로 흘려들을 게 아니다. 무슨 일을 하며 앞을 내다보는 것은 인간의 지혜에 속하는 일이다. 인간사란 예측불허요 변화난측하다. 지금 당장 목전의 일만 생각하고 나중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낭패하는 경우가 왜 없는가.
  
풍족하다고 낭비하거나 사치했다 종내 궁색할지 누가 알랴. 그럴 때 상대에게 손을 내밀자 함이 아니다. 사람 사이에 살면서 신의와 화합 속에 돈독히 지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바로, 동물들의 군집(群集)과 인간이 영위하는 사회가 다른 점이다. 

긴 안목에서, 서로 간에 포용하고 화해하면서 어우러져야 하는 것도, 장차 헤어날 ‘구멍’을 파두는 현명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중이도 들 꿈 날 꿈 잇나” 귀에 넣어 둬야 할 금언이다.
  
크게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을 도모하는 길과 한 맥락이다. 

나랏일도 예외일 수 없다. 외교 안보에서 민생 교육에 이르는 모든 국사(國事)는 들 구멍, 날 구멍에 대한 마련이 따라야 함은 말할 것이 없다. 구멍 하나가 막히면 심각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총체적 난국 말이다. 
  
더욱이 수많은 나라들이 국익(國益)을 최우선시하고 있다. 단적으로 각자도생(各自圖生)하고 있지 않은가. TV ‘동물의 세계’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날 포식자에게 먹히는 고라니 꼴이 돼서야 쓰겠는가. 하이에나의 집단적·전략적 사냥술은 자못 놀랍다. 얼마나 끈질기며 담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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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모습. 왼쪽부터 일본 아베 총리, 미국 트럼프 대통령, 독일 메르켈 총리, 캐나다 트뤼도 총리, 한국 문재인 대통령. 출처=g20 독일 홈페이지.
  
오늘의 세계는 거대한 동물의 세계, 정글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눈앞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말한 양력(養力), 종국에 강조한 주의대력(大力)주의가 절실하다. 

미·중·일에 에워싸인 한국, 때로 숨 가쁠 때가 있다. ‘들 구멍 날 구멍’도 필요하려니와 그에 앞서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한다. 힘엔 여축이 있을수록 좋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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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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