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32) 안 먹겠다고 침까지 뱉었던 우물, 삼 년도 안돼 다시 먹는다

* 먹켕 : ‘먹겠다고’의 제주방언
* 춤 : ‘침’의 제주방언. 한자어로 타액(唾液:타액 분비)
* 바끈 : ‘뱉은’의 제주방언. 바끄다(바트다)→ 뱉다
* 돼영 : ‘돼서’의 제주방언

퉤 하고 침 뱉으며 먹지 않겠다던 우물물을 얼마 없어 다시 먹게 된다는 얘기다. 않겠다는 ‘다짐’이 쉬이 깨짐을 아쉬워한다. 작심했으면 지키는 게 온당한 일이다. 

자고이래 ‘장부일언 중천금(丈夫一言 重千金)’이라 했거늘, 대장부 한마디는 무게가 천금 같다 함이다. 말의 무게를 천금의 가치에 빗댈 정도다.
  
옛날 수돗물이 나오기 전, 이 섬엔 물이 참 귀했다. 위아래 동네에 우물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는 웅숭깊은 우물은 귀했고, 바가지로 떠 물허벅에 채워 져 나르던 얕은 우물이 태반이었다. 가뭄이 심할 때는 물이 쫄쫄 나오므로 차례를 기다리느라 물허벅이 장사진을 이뤘다. 진풍경이었다. 
 
물은 생명수다. 그렇게 귀한 우물인데 안 먹겠다고 침까지 뱉었다면 그냥 일이 아니다. 무슨 곡절이 있을시 분명하다. 동네 사이에 다툼이 생겼거나 서로 간 이해에 맞서는 사단이 있었거나. 그래서 ‘다시는 안 먹겠다.’ 선언해 놓고 채 삼 년도 안돼 다시 먹는다면 이도 체면 구기는 일이다. 
  
우물물 먹던 소박한 시절 얘기다. 
  
요즘 세상을 돌아보면 이런 행태들이 어디 한둘인가. 밥 먹듯 마음이 변한다. 인심이 조석변이라더니 침도 마르기 전에 마음 변해 시변(時變)이 돼 버리는 세상이다. 시절 인심의 덧없음을 염량세태(炎凉世態)라 한다. 재력과 권세가 있을 때는 아부하다가 몰락하면 ‘언제 봤소.’ 입 싹 쓸고 돌아앉는다. 

그런 정도라면 그나마 쌓은 정리를 아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푸대접하기 일쑤다. 이렇게 표변하는 게 인심이라면 사람 사는 세상이 참 부박(浮薄)하다. 그런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올곧은 사람도 있긴 한 세상이다. 다만 그런 순직한 사람을 만나기 어려우니 안타깝다.
 
“게난 그 사름 허난 끝꺼지 남안 이섯댄 말이라?” 
(그러니까 그 사람 하나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말인가?) 

어떤 자리, 어떤 입장을 끝까지 지켰다는 건지 모르나 지조 있는 미더운 사람이다. 가령 오래 남아 눈총을 받더라도 짜장 제 도리를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인간다움’에 더할 가치는 없다.

문재인 정부를 곱게 바라보던 시선이 점차 날 서 가는 것 같다.

얼마 전 취임 100일이 지났다. 아이를 키우며 ‘백일사진’을 찍듯, 거기엔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의 의미와 무게가 있다.

문 대통령의 ‘백일’은 신선했다. 텅 비었던 곳, 모자라 허했던 데를 채워 놓아 대체로 충만했다. 이전 정부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탈 권위, 소탈한 행보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문 대통령이 ‘셀카’를 좋아해, 그게 바로 대통령의 소통법으로 자리매김한 느낌이다.

취임 첫날 출근길, 여름휴가 산행, 해외순방길 공항에서. 대통령이 시민들에게 다가가 얘기를 나누며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은 전엔 보지 못하던 장면이다. 한편 놀라움으로 다가올 정도다. 대통령의 경호를 어느 수준까지 풀어 버리는 느슨함과 적당한 방임(放任)이 주는 여유로움이 느껴진 것도 나쁘지 않았다.
  
대통령이 버스로 이동하는 것도 파격인데, 그분의 자연스러운 행색은 그보다 한 층위 위였다. 구겨진 남방셔츠, 헐렁하고 편한 바지, 등산화에다 빗질하지 않은 머리….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나온 모습이 눈길을 댕겼다.

코스프레가 아니다. 오바마 위로 우리 대통령 사진을 포개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세상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새 세상을 만드는 것은 역시 법이나 제도 이전에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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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위 대신 소통...문턱 낮아진 청와대 지난 11일 청와대 경내에서 만난 청소년 청와대 관람객과 문재인 대통령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 출처=청와대.

그런데 베일을 한 겹씩 벗는가. 이런저런 문제들이 속내를 드러낸다. 

우선 이 정부가 입에 달고 나온 ‘적폐 청산’. 전에 별로 쓰지 않던 이 말은 말뜻만도 그 적용 범위가 엄청나게 넓고 깊다.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이니 근원을 파헤치자면 정말 뿌리 깊다. 얽히고설켰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 갈 것인가. 하지만 한 올 한 올 반드시 풀어야만 할 일이다. 힘주어 표방했기 때문이다.
  
까닥하다 흐지부지 되고 말 우려가 다분하다. 문제다. 어느 구석 적폐 아닌 구석이 있는가. 닥지닥지 적폐가 각질로 덮인 형국이다. 오죽했으면 ‘이게 나라냐’ 했을까. 과문이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나와 있지 않은 것 같다.

국정을 떠맡을 인사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 자신은 가장 균형 있는 인사, 태평인사, 통합적인 인사라고 자평하고 있지만, 그걸 국민이 얼마나 인정할까. 자화자찬이라고 일축하고 있지 않은가. 독단이고 오만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인사 참사라고도 한다. 좀 더 겸손해야 한다는 주문들이다. 여소야대의 구조적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전은 협치밖에 없다. 인사와 병행해야 하는데 그건 되고 있는가.

그럴 리 있으랴만, 가령 그토록 외쳐 온 적폐 청산과 협치가 유야무야된다면 낭패다. 이 정부의 기반이 밑동에서 흔들린다. 국정농단으로 나라를 망친 과거와 결별하면서 그와 단호히 단절한다고 일어선 정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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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연구노조, '박기영 본부장 임명철회' 촉구 참여정부 시절 ‘황우석 연구논문 조작 사건’ 책임 문제로 부적절한 인사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박기영 전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임명자가 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과학기술계 원로 및 기관장과의 정책간담회’에 참석하자, 민주노총 전국공공연구노조 조합원들이 임명철회를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정규직 전환하고 최저임금 올려 주겠다는 마음은 좋은데, 뒤에 어떤 문제가 따라올는지 돌아보지 않는다. 본인이 퇴임한 다음의 문제를 내다보는 눈이 없다. 나라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돌아보지 않고, 한번 바꿔 보겠다는 욕구만 앞선 것처럼 보인다. 경계해야 할 것이 포퓰리즘이다.

혹여 촛불집회로 갑자기 대통령이 되면서, 영웅심리에 빠진 게 아닌가, 평상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궤도에서 상당히 이탈해 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렇게 의욕만 내세우다 목마르게 된다. 생명 있는 것들은 목마르다. 그럴 때, 목말라 어느 시점에서 물을 들이켤 때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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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 집회에서 한 장면 박근혜 정권 규탄 촛불집회가 막바지를 향하던 지난 3월 11일, 광화문 광장 촛불 집회에서 담벼락에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고 빛 글씨를 새겼다. '꺼지지 않는 촛불'은 대의제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진=오마이뉴스.

‘안 먹켕 춤 바끈 우물 삼 년도 안 되영 다시 먹는 꼴’이 돼선 안된다. 속담 속의 우물이 ‘나라’일 때는 언어도단, 있을 수 없는 문법이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정부의 중차대한 약속은 ‘촛불’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먼 데 눈을 주고 새 아침을 맞아야 한다. 이는 5년 임기를 관류(貫流)해 시종일관해야 하는 일이다. 

전에 파 놓은 우물은 이미 썩은 것이다. 나라님이 그 물을 다시 먹으면 어찌 되나. 선을 그어야 한다. 안 먹는다 한 우물은 먹지 말아야 한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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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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