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34) 송사다리와 몽니다리는 집안으로 간다고 한다

* 송사다리 : 송사(訟事) 잘하는 사람
* 광 : ‘과, 하고’의 제주방언, 접속조사임
* 몽니다리 : 몽니 부리는 사람. 심술궂어 생트집을 잘 잡는 사람
* 우던 : 혈통, 집안, 가문, 겨레붙이[族]
* 간댕 : ‘간다고’의 제주 방언. 한댕, 말햄댕 등

분쟁을 재판으로 해결하는 게 송사(訟事)다. 예로부터 송사는 사람이 할 일이 못된다고 했다. 서로 간에 화해하지 못하고 법으로 걸고 넘어지는 것이니,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일이다. 된 일 안 된 일, 사소한 다툼이 생기면 문제를 제기해 송사를 일삼는다 해서 송사다리다. 그리고 몽니다리 또한 그에 못지않게 심술보다. 상대방이 그다지 잘못한 일도 없는데 공연히 생트집 잡아서 심술을 부리는 것을 몽니라 한다. 

세상에는 그렇게 선량한 이를 괴롭히려 드는 사람들이 있다. 가만있는 사람을 엉뚱한 일에 끌어들여 힘들게 하는 고약한 성질이 ‘몽니’이고, 그런 성질을 부리는 사람을 일컬어 ‘몽니다리’라 한다. 자주 부리는 사람을 ‘몽니쟁이’, ‘몽짜’라고도 한다. 
  
무엇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지 않는가. 그런 몽니 궂은 사람과는 부딪쳐 봐야 짜장 얻을 게 없다. 

한편 ‘몽짜’가 ‘치다’와 결합해 쓰이면 뜻이 조금 달라지는데, ‘몽짜치다’라 하면 ‘겉으로는 어리석은 체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할 일을 다하다’는 뜻이 된다. 순수어로 ‘의뭉하다’라는 말이 그 뜻일 테다.

출처 미상의 글 하나가 있다. 직필(直筆)하려 한 어느 저널리즘의 의중이 읽힌다.  꽤 신랄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성장의 결실을 독차지한 세력들은 이제 노동자의 땀방울을 이용한 부의 축적이 더디게 되자 공연히 생트집을 잡으며 진보 진영에 ’몽니‘ 부리는 징후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몽니는 그냥 심보가 아니다. 음흉하고 심술궂어 욕심을 부리는 것이라 고약하다. 이 말이 한때 정가에서 회자된 적이 있었다.

1998년 김종필 전 총리가 “우리도 성질이 있다. 때를 맞춰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되 그러고도 안되면 ‘몽니’를 부리면 된다”고 내각제에 대해 말한 바 있었다.

“송사다리와 몽니다리는 집안으로 간다고 한다”

옛날 인심 좋고 소박하던 시절에 오죽했으면 이렇게 말했겠는가. 툭하면 송사하자 나서고, 순진하고 무고한 이웃에게 심술이나 피우는 사람이 심심찮게 한 마을에 몇은 있었던 모양이다. 한 동네에서 팔 걷어붙여 땀 흘려 가며 파놓은 우물을 같이 먹고, 수눌음 품앗이하며 가족처럼 지내야 할 처지인데도 나쁜 마음을 먹고 또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니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을 테다. 천덕꾸러기는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있는 법이다.

한데, 그런 자가 태어나는 집안이 따로 있다 해서 ‘우던으로 간다’ 한 것이 아닌가. ‘우던’이라 함은 ‘집안’이요, ‘가문’을 뜻하는 우리 방언이다. ‘혈통(血統)’을 뜻한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DNA 곧 유전자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송사 좋아하고 몽니부리는 ‘피’가 달리 있다는 말이다.

고대소설 <흥부전>에 등장하는 놀부가 심술꾸러기, 심술쟁이, 심술퉁이로 몽니다리의 전형적 캐릭터다. 놀부가 오장육부에 심술보 하나가 더 덧나 있어 오장칠부라 했겠다.

“놀부의 심술를 볼작시면 초상 난 데 춤추기, 불 난 집에 부채질하기, 해산한 데 개닭 잡기, 장에 가면 억매(억지) 흥정하기, 집에서 몹쓸 노릇 하기, 우는 아기 볼기 치기, 간난아이 똥 먹이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심술을 부린다.

▲ 손혜원 의원이 4일 김장겸 MBC 사장 체포영장 발부를 '언론 장악'이라 규정하며 국회 보이콧을 선언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피켓 시위 현장을 페이스북에 생중계했다. 자유한국당이 국회 일정을 거부하고 시위에 나선 4일은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한 날이다. 사진=오마이뉴스.

‘우던’이라 했으니 하는 말인데. 자고이래(自古以來)로 흔히 쓰이는 말이 우던이다. 

“그 아이 못된 지성머리 하는 거 무신 따문인지나 알암서? 거 다 우던으로 하는 거라게, 우던으로. (그 아이 못된 버릇 하는 거 무슨 때문인지 아는가? 그거 다 집안 내력으로 하는 걸세, 집안 내력으로.)” 

제주지방에는 지금도 우던이란 말이 언어현실에서 집안 내력 혹은 핏줄, 혈통이란 뜻으로 심심찮게 쓰인다.
  
나쁜 짓,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집안에 그런 ‘피’가 있어 그런 거다, 조상 적부터 물려받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함이다.
  
동네에 좀도둑이 누구라고 알게 모르게 지목하던 일이 기억 속에 떠오른다. 소위 ‘검은손’인데, 그런 집에는 어른 따라 아이들도 손이 검다고 눈을 흘기곤 했다. 선량한 사람이 살던 이 섬에도 그런 질 안 좋은 불량자가 섞여 살았던 것이다. 인간 사회가 생각처럼 단순한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눈길을 북쪽으로 돌려보자. 북한엔 선거다운 선거가 없다. 정권 창출이 세습에 의한 것임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져 세 번째다. 북한이 왕조국가인가. 지구상에 이런 정권은 유일무이하다. 아프리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IE001404526_STD.jpg
▲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표지모델로 등장한 김정은. 사진=오마이뉴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운 게 ‘백두혈통’이 아닌가. 아무나 ‘원수’ ‘수령 동지’가 되는 게 아니고, 위로부터 그런 피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 왕후장상의 피가 따로 있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다. 북한 같은 체제에서나 먹혀들어가는 기막힌 억지다.
  
김정은의 피둥피둥 살찐 체구와 기름기 번지르르한 얼굴이며, 복장까지 하르방 김일성 코스프레가 아닌가 말이다. 이런 소극(笑劇)이 어디 있는가. 삼십대 초반에 그런 분장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역시 ‘우던’으로 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건 여사한 일이라 하고, 기회만 되면 뻥뻥 쏘아 올리는 핵실험에다 미사일 발사, 심지어는 몇 억이 살고 있는 일본 상공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는 판이다.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건 말건 악화일로로 치닫는 형국이다. 계속 도발을 일삼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심술이 없다.
  
이렇게 몽니다리로 자꾸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바람에 우리 안보가 심히 위협 받고 있지 않은가. 사드 추가 배치가 완료됐다. 상황의 심각함을 알아차려 사드배치 반대 집회를 하던 주민들도 수그러들면 좋은데 반대에만 급급하니, 답답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평화의 땅, 한반도가 화약고가 돼 가는 것 같아 가슴 아리다. 김정은이 저러는 한 상황이 더욱 복잡 미묘해질 것은 불을 보듯 한 일. 해법은 없는 것인지 가슴만 쓸어내린다.

북한정권과 송사할 일은 없다. 북한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이런저런 정황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그들이 안쓰럽다. 온 민족이 통일을 희원하며 가는 길에 제발 한반도의 안보만은 튼튼히 다져 놓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북한정권이 각성해 이제라도 핵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게 세계 속에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몽니’나 부리면 종국엔 자멸한다. 역사에서 배울 일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증명사진 밝게 2.png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