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19) 지느러미 남자 / 조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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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동문시장 은갈치. ⓒ 김연미

아침부터 당도한 문자 열나흘째 폭염 특보

오늘도 동문로터리 붐비는 수산시장 삼십 분 무료 공용주차장 귀퉁이에 오래된 봉고 Ⅲ 1톤 탑차 부축해 앉혀둔다 흐르는 땀 눈에 들면 어찌나 따가운지 이마에 버프 질끈 두르고 은갈치 상자 나르는데 머리 많이 아프우꽈? 물어보는 주인아줌마 아무래도 우리 땅에선 이 모습이 낯선 걸까? 배달엔 젬병인 날 물끄러미 쳐다본다 잠깐만 잠깐만요, 비켜주세요, 외쳐 봐도 꿈쩍 않는 밭담보다 더 길어진 제주땅 중국인 행렬 배워둘 걸 중국어, 왁자지껄 좁은 시장통 크루즈 타고 온 서양인들 옆을 지날 땐 익스큐즈 미, 익스큐즈 미, 24년 밥 먹여 준 영어가 모세의 기적같이 동문수산시장 길을 튼다 달그락대는 낡은 손수레가 지나는 고객과 부딪칠까 연신 되뇐다 제발 비켜달라고, 제발 비켜달라고..., 은갈치님 나감수다, 옥돔님 납셔수다 제주바당 동문이 날마다 모이는 동문시장, 때로는 고등어도, 삼치도, 참조기도 얼굴을 내밀지만 역시 우리 회장님은 반짝반짝 은갈치다 냉동 짐칸 다 비우고서야 돌아온 그 주차장에서

파르르
내 젖은 몸에 돋아나는
지느러미

-조한일 [지느러미 남자] 전문-

우리네 삶을 이야기 할 땐 사설조가 제격이다. 윤기 있고 매끄러운 삶이라면 반듯한 연시조나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시조가 제격일 터이지만 팍팍하고 숨가쁜 삶을 이야기하는데 반듯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건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 들어주는 이 없어도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다보면 가슴에 맺혔던 돌덩이 하나 모래로 부서지기도 하고, 두서없이 속엣말 다 내 뱉고 나면 다시 응어리진 삶의 시간을 가슴에 들여놓을 수 있는, 빈 자리 하나 만들어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열나흘째 폭염 특보’가 문자로 찍힌 날, 날씨조차 폭력적이다. 동문시장에 은갈치 배달을 하는 남자의 시선과 생각을 따라간다. 30분이라는 시간, 냉동 탑차에 실린 1톤의 은갈치, 바닷속을 떼지어 다니는 은갈치떼처럼 동문시장 골목을 흘러 다니는 단체관광객, 제한적인 시간과 제한적인 공간, 제한적인 환경을 주어놓고 준비 땅, 백 미터 달리기처럼 배달이 시작된다.
 
눈으로 흘러들어가는 땀을 막기 위해 이마에 버프를 두르고, ‘밭담보다 더’ 긴 중국인 행렬로 가로막힌 길 앞에서 중국어나 배워둘걸 후회를 한다. 그나마 ‘익스큐즈 미’ 한 마디에 모세의 기적처럼 뚫리는 길이 다행이다. 생선 배달을 하는 이들에게 은갈치, 옥돔, 고등어, 삼치, 참조기 등은 모두 받들어 모셔야 할 상전이다. 지나는 고객들과 부딪쳐서도 안된다. 시간의 분량과 반비례로 하락하는 상품의 가치에 사람과 좌판과, 좁은 공간을 은갈치 물속을 헤엄치듯 남자는 시장골목을 유영하는 것이다.

전쟁 같은 배달을 마치고 나면 30분이라는 무료주차의 조건을 어기지 않았는지도 걱정이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요행히 시간이 남아 있다면 끊어야지 결심했던 담배 한 개비 피워 물어도 좋을 것 같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표정을 바꾸는데, 담배 연기로 위장된 한 숨 몇 번만큼, 딱인 게 없으니 말이다. 전쟁의 상처처럼, 혹은 훈장처럼, 온몸에 은갈치 비늘 잔뜩 바르고 탑차에 기대어 잠깐 서 있는 사이 남자의 겨드랑이 아래로 길게 지느러미 새로 돋아날 것만 같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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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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