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21) 고요 / 이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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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 ⓒ 김연미

붉은
고추를 먹은
잠자리 한 마리가
억 년 고인돌에 슬그머니 앉는 찰나
바위가 우지끈, 하고
부서질 듯
환한,
고요

- 이종문, <고요> 전문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 글은 이해가 쉽다. 뜻하는 바가 아무리 깊고 심오해도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거의 자폐증적인 작품을 써놓고 독자의 이해 수준을 탓하는 요즘 문단의 세태에 이종문님의 <고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처음 이 시를 대했을 당시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고요’라는, 맛도, 형태도, 소리도, 색깔도 없는 관념어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그려내는 작가의 설득력 앞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던...  고인돌 위에 슬그머니 내려와 앉는 고추잠자리, 그 고요함. 이게 이 작품의 전체 내용이다. 특별한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았고, 심오한 진리를 억지로 갖다 붙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단순 명료하게 그려진 수채화 한 점에는 원초적 본능처럼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게 무얼까. 

‘억 년’과 ‘찰나’, ‘고인돌’과 ‘잠자리’를 대비시켜 보자. 길고 짧음의 대비,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비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했다. 이 간단한 진리를 끌어와 작가는 ‘고요’라는 이미지를 그려내려 한다. 아주 긴 시간을 건너온 고인돌 위에 아주 잠깐 아주 가벼운 잠자리가 와서 앉았다. 이론상으로 보면 무게중심은 모두 고인돌에게 가 있다. 그러나 상황은 어떤가. ‘바위가 우지끈, 하고 부서’져 버린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잠자리의 절대적 승리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온전히 잠자리의 몫인가. 바위가 그렇게 부서질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고요’라는 촉매제가 있었던 것이다. 고요의 분위기는 너무나 깊고 진해 이미 어떤 강한 것도 부서뜨릴 만큼 무거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 고요의 무거움을 안간힘으로 버티던 바위 위에 아주 작은 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앉았을 뿐인데, 그만 우지끈, 하고 부서져 내리는 것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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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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