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45) 물라고 한 꿩은 아니 물고, 사돈집 씨암탉을 물어 든다

* 물랭 혼 : ‘물라고 한’의 제주방언
* 안 물곡 : 아니 물고
* 씨암탁 : 씨암탉, 씨를 받으려고 기르는 암탉
* 물엉 : ‘물어’의 제주방언
  
만날 땀 흘리며 땅 파 봤자 소출이 적어 끼니 잇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절해고도라 육지를 쉽게 기웃거리지도 못한다. 참 열악했던 섬이다. 우리 선인들, 그나마 부지런 공으로 생을 지탱해 온 터다.

넉넉지 못한 삶 탓일까. 정신만은 느긋해 여유롭다가도 자칫 언짢은 생각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제주속담에는 부정적 대구(對句)가 적지 않다.
  
“고운 년 잡아들이랜 호난, 살진 년 잡아들인다”(고운 여자를 잡아들이라 했더니, 뚱뚱하게 살찐 여자를 잡아들인다)느니, “고르내 혼 말은 안 골곡, 곧지 말랜 혼 말은 더 잘 곧나”(하라는 말은 아니 하고, 하지 말라고 한 말은 더 잘 한다) 등을 보면 그렇다. 

‘하지 말라는데 굳이 한다’는 식 어법(語法)으로 말에 모름지기 환경요인이 작용하는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간에 이 일, 그냥 일이 아니다. 물어오라 한 꿩은 물어오지 않고, 사돈집 씨암탉을 물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사농 들어사 개 가리친다’고 했다. 개는 아무 때나 순치(馴致)하는 게 아니라 사냥철이 들어야 가르치는 법. 당장에 버릇을 가르치지도 못한다. 그만 일을 벌이고 말았으니 이를 어찌할꼬. 잡아오라는 꿩을 잡아오지 않은 것이 문제인가. 남의 집에 기르는 닭을, 그것도 사돈집 씨암탉을 물어왔지 않으냐. 이쯤 되고 보니 웬만한 사단이 아니다. 대형 사고다.

사돈 간이 얼마나 어려운가. 사돈은 촌수가 없다고 ‘무촌(無寸)’이라 했다. 가깝고도 먼 사이. 깍듯이 예도를 갖춰야 하는 사이임은 세상에 모를 사람이 없다. 한데 개란 짐승이 가란 산엔 가지 않고, 하필 사돈집에 날려들어 씨암탉을 잡아왔으니 일이 참 묘하게 꼬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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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는 아무 때나 순치(馴致)하는 게 아니라 사냥철이 들어야 가르치는 법. 당장에 버릇을 가르치지도 못한다. 사진=오마이뉴스.

씨암탉이 어떤 닭인가.

장모가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 먹이는 오랜 풍속이 있다. 쇠고기도 있고 돼지고기도 있는데, 굳이 씨암탉이라야 하는 이유가 왜 없으랴. 닭에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 닭은 양조(陽鳥)라 해서, 양기(陽氣)를 제공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닭은 양기가 넘치는 동물인데다 알을 낳는 씨암탉이니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깊은 의중이 들어 있다.

그뿐 아니다.

닭은 귀신을 쫓고(축사, 逐邪), 천지에 새벽을 알리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문(文), 무(武), 용(勇), 인(仁). 신(信)의 다섯 덕목을 두루 갖추었다. 장모가 사위에게 바라는 덕목이 모두 들어 있은즉, 씨암탉을 먹고 함께 행복하게 살라는 친정어머니의 간절한 염원과 정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사위가 집에 오면, 장모님이 씨암탉부터 잡아 대접하는 게 우리의 전통풍속이었다. 오늘날에야 흔하디흔한 게 닭고기이니 까짓 토종닭 한 마리 잡는 것이 뭬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으나, 예전에는 귀한 손님이 있을 때 으레 앞마당에 놓아기르던 닭을 잡아서 손님상에 올렸다. 그러니 사위에게 잡아 주는 씨암탉이야말로 극진한 손님 대접의 상징이었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사위는 '백년손님(百年之客)'이라 했다. 게다가 사위사랑은 장모라 했잖은가.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서 먹이는 장모님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만하다.

이에 그치지 않아, ‘씨암탉을 잡은 듯하다’고 하면, 집안이 매우 화락함을 이르기도 했다.

“물랭 혼 꿩은 안 물곡, 사돈집 씨암톡은 물엉 든다”고 했으니, 일이 엉뚱하게 돼 버렸다. 개는 역시 개다. 개같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귀한 손님이 올 때, 또 사위가 올 때를 대비하느라 좋이 키우던 씨암탉을 그것도 사돈집 가금(家禽: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을 물어 질질 끌며 들어왔지 않은가.

뒷수습이 쉽지 않으리라. 정중히 의대(衣帶)를 갖추고 사돈가를 방문해 용사를 빌어야 풀릴 동 말 동한 일이다.

실제 상황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해학취미에서 지어낸 허구적 설정으로 봄 직도하다. 곯은 배를 움켜잡아야 했던 쪼들리는 살림에도 웃음을 잃지 않던 섬사람들의 낙천성, 체질화된 익살이 은근히 배어 있는 게 아닌가. 어떤 일에 대해, 사실관계를 떠나 한 번 틀어서 바라보는 눈길이 여간 흥미롭지 않다.

사람의 짓이든 개의 짓이었든 간에 엉뚱한 짓이다. 동으로 가라 했더니 서로 가는 사람도 있는 세상이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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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덕꾸러기 개망나니 짓, 골칫거리다. 사진=오마이뉴스.
바로 코앞에 그런 자가 있지 않은가. 평화를 갈망하는 온 인류가 제발 ‘하지 말라’고 그렇게 입을 모으는데도 불구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북한의 김정은. 돈을 핵개발에 물 쓰듯 쏟아 부을 일인가. 당장 인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판국에 이 웬 한심한 일이냐 묻고 또 묻고 싶다. 7년 만에 김정은 정권을 테러지원국으로 재 지정했다는 보도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으랴.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려도 풀리지 않는 게 이 일인가 한다.

한 번이라도 물어오라 한 꿩을 물어오면 오죽 좋으랴, 개가 어이없게도 사돈집 씨암탉을 물 듯, 핵개발에 눈 빨개진 김정은을 어찌해야 할꼬. 웬만한 압박으론 안되니 문제다. 천덕꾸러기 개망나니 짓, 골칫거리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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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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