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려올 땐 하르바님 하르바님 허당 올라갈 땐 나 아덜놈 나 아덜놈 혼다"
"노려올 땐 하르바님 하르바님 허당 올라갈 땐 나 아덜놈 나 아덜놈 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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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47) 내려올 때는 할아버님 할아버님 하다가 올라갈 때는 내 아들놈 내 아들놈 한다

* 노려올 땐 : (높은 데서 아래로) 내려올 때는 
* 하르바님 : 할아버님
* 허당 : 하다(가)
* 아덜 : 아들(子). 또는 ‘아덜’

삥삥 내달린다 했다. 재빨리 재게 내뺀다 함이다.

어릴 적에 다랑쉬오름을 오르며 눈으로 봤던 일이다. 노루 한 마리가 인기척에 오름 위로 번개처럼 내달렸다. 짧은 앞다리가 땅에 닿기가 무섭게 긴 뒷다리가 노루를 밀어 올렸다. 놀라운 속력의 질주다. 그러다 밑으로 내리게 되면 뛰지 못한다는 어른들 말이었다. 뒷다리 힘이 아래로 작용하면서 밀어내리면 바로 엎질러져 나뒹군단다. 적에게 노출됐을 때, 노루는 높은 곳으로 몸을 놓고 사력을 다해 내달린다. 다랑쉬오름은 경사가 매우 급해 가파르다. 노루에겐 제격이라, 촐랑거리며 내달린 놈이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졌다.  

노루의 네 다리 중 앞다리는 뒷다리보다 아주 짧아서 높은 곳을 향해 오르막길을 달릴 때는 아주 유리하나, 높은 곳에서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는 이만저만 불리하지 않다. 바로 이 대목이다.

그래서 내리막 비탈에서 쫓길 때는 잡혀 죽지 않으려고 ‘할아버님, 할아버님’하며 제발 살려 주십사고 애걸복걸 사정한다. 하지만 높은 동산 쪽으로 쫓김을 당할 때는 감히 누가 나를 따라 잡을 수 있겠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내뺀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노루의 생태는 곧바로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불리한 처지, 곧 곤경에 빠졌을 때는 통사정을 하다가도 형편이 좋아져 남에게 굳이 사정할 필요가 없을 때는 안하무인으로 오만방자를 떠는 것이다.

비슷한 속담이 있다.

“돈 이실 땐 성님 성님호당 돈 어시민 얘야 자야 혼다”
(돈이 있을 땐 ‘형념 형님’ 하다가 돈 없으면 ‘얘야 자야’ 말을 함부로 낮춰 한다)

사람 마음을 일컬어 조석변(朝夕變)이라 하는데, 그것은 결코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바른 방식이 못된다. 금방 ‘할아버님’아라 불렀던 사람을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눈앞에서 ‘아들놈’이라 할 수 있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아들에다 ‘놈’자까지 붙여 비하해 가면서.

똑 닮은 말이 있다. ‘뭐 마려워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사성어가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

논어 ‘학이편(學而篇)에 나온 말이다. 공자는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사람은 어진 사람이 적다(巧言令色, 鮮矣仁)'라 했다.

그럴듯하게 잘 꾸며 내거나 남의 비위에 맞추기 잘하는 사람 그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남의 눈에 잘 보이는 사람은 마음씨가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적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참되고 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노려올 땐 하르바님 하르바님 호당 올라갈 땐 나 아덜 놈나 아덜 놈혼다'는 상당히 풍자적인 빗댐이다. 앞뒤 다리 길이가 짧고 길어 상황에 따라 유‧불리가 갈리는 노루의 생태를 통해 인간에게 잠재해 있는 근성을 기가 막히게 꼬집어 놓았다. 

‘하르방 하르방’ 하고 부른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교묘한 아첨의 말이고, 그럴 때 낯빛 또한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고 온갖 표정을 다 꾸몄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고 표정을 그럴싸하게 지어 알랑방귀 뀌어 가면서 현혹시킨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교언영색하는 기질이 조금씩은 자리해 있다는 것인지, 비슷한 말들이 꽤 있다. 

감언이설(甘言利說)은 사탕발림이란 뜻으로 남의 마음을 꾀기 위한 달콤한 언사를 말함이고, 앞뒤가 다르게 행동하는 간사한 태도를 가리키는 표리부동(表裏不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배반하는 면종복배(面從腹背), 양의 머리를 내걸어 놓고 실제로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선전은 버젓하지만 내실이 따르지 못함을 빗대는 양두구육(羊頭狗肉)….

세상엔 그렇지 않고 똑바른 사람들도 많은 법이다. 논어 ‘자로편(子路篇)’에는 “강(剛)과 의(毅)와 목(木)과 눌(訥)은 인(仁)에 가깝다”는 말이 나온다. ‘강’은 강직(剛直), ‘의’는 과감(果敢), ‘목’은 순박(淳朴), ‘눌’은 어둔(어둔, 말이 어눌함)을 말한다. 강직하고 과감하고 어둔한 자는 곧 자기 본심 그대로를 지니고 있는 사람임을 뜻한다.

처지가 바뀜에 따라 ‘하르바님’이 ‘아덜놈’으로 순식간에 변하는, 쉽게 변심하는 사람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시상 천지에 그런 사름 엇나. 호나에서 열꺼지 틀림없는 사름이여.(세상 천지에 그런 사람 없다. 하나에서 열까지 틀림없는 사람이네.)” 

그런 순직한 사람, 이랬다저랬다 시종 흔들림 없는 사람도 많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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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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