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오름기행] 백가지 약초 자생하는 '백약이 오름'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남제주군 성읍리 목장 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손바닥지도 하나 들고 찾아가는 제주 오름기행은 안개 낀 날이 제일 힘겹다. 길은 뚫려 있으나 오름의 봉우리를 쉽게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화산 쇄설물을 밟으며 '봉우리' 꿈꾸다

제주의 날씨는 참으로 변덕스럽다. 백약이오름을 찾지 못해 목장 주변을 헤매던 중 안개 속 세상이 삽시간에 걷힌다. 그리고 신비스럽게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오름이 열렸다. 
 

▲ 사람들은 가장 높은 봉우리만 골라서 오른다. ⓒ 김강임
새벽 여명이 밝아 오듯 오름의 입구에서는 안개가 걷히고 푸른 초원이 깨어난다. 초원 위에 누워있던 살찐 소들이 갑자기 일어선다. 오르미의 등에서는 후줄근히 땀이 흘러 내렸다. 표고 356.9m, 비고 132m, 둘레 3124m의 백약이 오름은 표고가 그리 높지 않지만, 조금은 경사가 심했다.

오리무중에서 해방된 기분. 모처럼의 휴일, 오름 동행을 함께 해준 그(남편)는 나보다 먼저 봉우리에 올랐다. 그리고 "봉우리 안에 원형분화구가 있어!"라며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백가지 약초가 자생하는 '백약이 오름'

   
 
 
'백약이 오름'은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산 1번지. 표고 356.9m, 비고 132m, 둘레 3124m로, 굼부리 모양은 원형분화구(깊이 49m) 둘레 바깥 1500m, 바닥 150m이다.

오름의 특징은 산정부의 북쪽과 북동쪽에 봉우리가 솟아 있고 커다란 원형분화구를 갖고 있는 제법 큰 화산체이다. 오름 기슭에는 삼나무가 조림된 숲이 있고, 개량초지 등으로 풀밭을 이룬다.

백약이 오름 식생으로는 제주와 이북에서만 자란다는 피뿌리풀이 듬성듬성 자생하고 있다. 오름 전사면에 약용으로 쓰인다는 복분자딸기, 층층이꽃, 향유, 쑥, 방아풀, 꿀풀, 쇠무릎, 초피나무, 인동덩굴 등 수십 가지 약초가 산재해 있다.

원형분화구 내부는 풀밭을 이루며 청미래덩굴, 찔레나무, 진달래 등이 식생하고 있으며, 왕릉모양의 정상봉 사면 일부에 나무가 우거져 있다. 백약이 오름 어원은 백가지 약초가 자생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일상에 찌든 생활에서 벗어난 해방감. 목장주변에 솟아난 봉우리에 오르며 심호흡을 해 본다. 뒤따라 봉우리를 오르던 나는 가수 양희은이 불렀던 '봉우리'란 노래를 불러보았다. 기생화산을 오르면서 부르는 노래 '봉우리'. 화산쇄설물을 밟으며 더 높은 고갯마루를 꿈꾸는 인간의 욕망. 오름은 내 마음 속 작은 동산일 테지만, 오름 등성이를 걸으며 늘 제일 높은 봉우리를 찾는다. 그렇기에 오름기행을 하다보면 인생의 고갯길을 체험하게 된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봤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 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 생각진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잊어 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 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가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 양희은의 노래 '봉우리' 중에서

▲ 초원이 이룬 백약이 오름의 분화구는 마치 대형 무대 같았다. ⓒ 김강임
대형무대 같은 분화구

백약이오름의 분화구는 마치 무대 같았다. 분화구의 깊이가 49m, 둘레 바깥 1500m, 바닥 150m이니 무대치고는 대형무대 같은 분위기다.

▲ 오름 분화구는 150m의 초원을 이룬다. ⓒ 김강임
누가 저렇게 넓은 잔디를 관리하는 걸까? 누가 저렇게 파란 잔디 위에 물을 주었을까? 누구도 백약이오름 분화구를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분화구는 마치 사람이 만든 정원 같다.

공연장 같은 분화구 안에서 사뿐사뿐 걸어 보고 싶은 충동, 분화구의 파란 잔디 위에 누워보고 싶은 마음, 백약이오름 분화구로 달려가 '백조의 호수'를 꿈꾸어 본다.

▲ 백약이 오름에는 엉컹퀴와 꿀풀, 씀바귀,쑥 등이 서식하고 있다. ⓒ 김강임
백가지 약초 자생하는 오름

넓은 분화구의 능선을 따라 걸어 보았다. 백가지 약초가 자생한다는 백약이오름은 온통 풀밭이다. 사람의 몸을 이롭게 하는 약초, 그 약초가 풀밭에 숨어 있다니 백약이오름은 보물창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말이지 언뜻 보기에는 잡초 같지만, 흙에 뿌리를 내린 쑥과 보랏빛 꽃 속에 꿀을 담고 있는 꿀풀, 산딸기가 보였다. 그러나 탐라 황기, 잔대, 청미래 덩굴, 굴피나무, 예던나무 등이 자생한다지만 찾아보지 못했다.

▲ 백약이 오름 가장 높은 봉우리는 '왕관 쓴 봉우리' ⓒ 김강임
오름 속 오름 잔치

둥그런 능선을 걸어보니 운동장의 트랙을 한바퀴 돌아보는 기분이랄까. 능선에서 바라보는 능선 위에 또 하나의 오름이 걸터앉는다. 능선의 가장 높은 봉우리 옆에 좌보미오름이 나타나더니 몇 발자국을 옮기니 용눈이오름과 높은 오름이 비친다.

표고 356m에서 펼쳐지는 오름의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하늘 아래 이만큼 아름다운 곡선이 또 있을까? 아름다운 곡선을 밟고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또 다른 오름의 능선이 펼쳐지니 말이다.

얼마 전 굼부리의 아름다움에 취했던 아부오름의 분화구와 민오름, 비치미, 개오름 등 프리즘에 비친 형상들이 분화구 능선 뒤로 펼쳐진다. 
 

▲ 능선 위에 걸터 앉은 한라산 ⓒ 김강임
여인의 허리처럼 가녀린 능선 위에 한라산이 걸터앉았다. 제주의 오름 어느 곳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한라산, 그래서 한라산을 제주 오름의 아버지라 했던가? 
 
▲ 백가지 약재가 서식하는 초원에 메뚜기가 날아들다. ⓒ 김강임
왕관 같은 능선에는 메뚜기 잔치가 열렸다. 메뚜기 한 마리가 폴짝 뛰더니 풀 위에서 무등을 탄다. 풀잎은 메뚜기가 무겁지도 않나 보다. 이렇듯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더불어 살아 숨 쉬고 있는 기생 화산체. 그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함께 상생한다.
 
▲ 목장의 방목으로 훼손되어가는 오름 ⓒ 김강임
오름이 훼손되어 가는 안타까움

그러나 아쉬운 것은 백약이오름이 목장 주변에 있다 보니 소와 말들의 무단방목으로 오름 속살이 훼손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목장의 소들이 오름을 무단 침입하여 오름 정상부분까지 올라가다 보니 붉은 흙덩이가 파헤쳐지는가 하면, 오름에 자생하는 식물들이 훼손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위험한 현상은 외국산 귀화식물들의 번식문제이다. 제주 오름을 기행하다 보니 오름 곳곳에 번식하고 있는 '개민들레'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여러 기관에서 개민들레의 번식을 우려해 퇴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으나, 오름마다 개민들레가 천국을 이루고 있다.

특히 개민들레는 주변 식물을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습성이 있으며 바람으로 인한 번식력이 강해 빠른 속도로 번식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하루 빨리 대처해줘야 할 사항이 아닌가 싶다.

▲ 가장 높은 봉우리 다시 낮은 데로 향하다. ⓒ 김강임
'왕관 쓴 봉우리', 낮은 데로 향하다

봉우리에 올라 더 큰 봉우리를 행해 달려가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 오르면 정상을 꿈꾼다. 특히 백약이오름 정상은 왕관 모양의 봉우리가 왕비의 자태를 연상케 한다.

▲ 쥐똥나무에는 하얀 꽃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 김강임
백약이오름 가장 높은 봉우리에 걸터앉았다. 백약이오름의 가장 아름다운 능선에 주저앉아 있으니 쥐똥나무 끝에서는 하얗게 핀 꽃들이 소곤거린다. 쥐똥나무 아래에는 씀바귀와 엉겅퀴 꽃이 얼굴을 내민다.

오름에서 길은 모두 봉우리로 통한다. 그러나 제일 높은 백약이오름 '왕관 쓴 봉우리'에 걸터앉아 있으니 그 최고봉은 다시 낮은 데로 향하고 있었다. 드넓은 목장의 한가로움, 멀리보이는 성산포 바다, 그리고 어깨를 겨룬 오름과 오름들. 사람들은 산을 오르면서 봉우리를 꿈꾸지만, 가장 높은 봉우리는 다시 낮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찾아가는 길 : 제주시- 동부관광도로- 대천동 사거리- 성읍2리 마을- 목장- 백약이 오름으로 제주시에서 1시간정도 소요된다. 백약이 오름을 오르는 데는 20분 정도가 소요되지만, 오름 분화구를 따라 걸어 보는 데도 30분정도가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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