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80) 크레이그 램버트, 『그림자 노동의 역습-대가 없이 당신에게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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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이그 램버트, 『그림자 노동의 역습-대가 없이 당신에게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 (민음사, 2016)
대학들이 전자출결석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유행인 모양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새롭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많은 이유가 제시된다. 학사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수업시간의 낭비를 줄인다는 진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지겹도록 들어온 효율성(efficiency)이 대학 강의실까지 들이닥친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도무지 무엇을 위한 효율성인지 깊이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다. 성찰 없이 정해진 수량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내용이 텅 빈 ‘효율성’만 있을 뿐이다. 대학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강의, 토론, 논쟁의 목적은 성적으로 표시되는 ‘결과’를 ‘효율적으로’ 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교수와 학생 사이의 지식전달은 고객으로서의 학생이 단위 시간당 매겨진 가격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상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출석을 부르는 따위의 ‘하찮은’ 일은 시스템이 알아서 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세태인 것 같다. 이런 변화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문제를 제기하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로 눈총을 받을 수도 있다. 정말 그럴까? 사회철학자 존 오닐(John O'Neill)은 그의 저서 『시장, 숙의 그리고 환경』(Markets, Deliberation, and Environment)에서 화폐적 관계로 간주될 수 없는 대상까지 시장의 논리를 확장할 때 그 대상자체가 소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친구 사이의 오랜 우정을 금전적 관계로 생각하는 순간 그 관계는 붕괴돼 버리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대학 강의실에서 출석을 점검하고 성적을 부여하는 행위는 결코 효율성이라는 낯선 기준에 맞추어 질 수 없다. 학생과 교수는 이름을 호명하고 얼굴을 마주보고 눈을 마주치면서 매 순간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 간다. 깊이 있는 의견 교환과 학문적 교감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이러한 관계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에게도 학습의 과정이다. 강의실의 상호작용은 매 순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황을 연출하고 서로에게 창조적인 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출결석은 이미 황폐화되어 가고 있는 강의실의 풍경을 더욱 삭막하게 만들면서 이러한 창조적이고 동적인 관계의 토대를 허물 수도 있다.

크레이크 램버트가 『그림자 노동의 역습』에서 제시한 분석으로부터 전자출결석 시스템의 또 다른 결과를 논할 수 있다. 그것은 교수와 학생들의 그림자 노동이다. 효율성의 명목아래 제시된 시간절약의 논리가 역설적으로 교수와 학생들에게 그전에는 하지 않아도 되었던 노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가져야 하고, 시스템에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켜야 한다. 작은 오류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시간을 써야 하며, 예외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부수적인 노동도 동반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 어떤 협상과 해석의 여지가 없는 출석관리에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대학당국은 위치정보에 의해 확인된 출결 자료를 수업을 관리하고 학생들을 통제하는 데이터로 축적할 것이다. 대학의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학생과 교수가 떠맡게 되는 것이다. 왜 학생과 교수들은 학사관리라는 명목아래 자신들이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와 긴장을 요구받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불과 십몇 년 전만 해도 사람에 의해 수행되었던, 그래서 말을 건네고 눈을 마주치면서 했던 많을 일들이 사라지면서 스크린 터치에 의해 작동하는 자동화 기계를 상대하게 되었다. 관공서를 비롯한 모든 기관과 회사의 전화는 자동응답기가 안내해 주는 지루한 버튼 누르기의 연속이며 그 절차가 끝난 후에도 긴 대기시간을 견뎌야만 원하는 서비스에 ‘도달할’ 수 있다. 상품의 정보를 잘 아는 판매원은 사라졌고 아주 오랜 시간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가격과 품질 정보를 비교하는 수고로운 노동을 한 후에야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또 하나의 과정을 넘어서야 한다. 판매 회사가 원하는 개인 정보를 넘겨준 후에야 거래를 완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항공권을 예약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시간대의 각 항공사의 항공편의 가격대를 비교한 후 모든 정보를 직접 입력하고 결제해야 한다. 온라인에서 예약을 변경하거나 취소하는 절차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고통스러운 전화통화 연결의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항공사도 나의 정보를 요구하기는 마찬가지다. 호텔을 예약하고, 영화표를 구매하는 등 일상의 소소한 일까지 소비자 스스로의 수고가 투여되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일들로 가득하다. 

램버트 주장의 핵심은 이러한 시스템의 변화가 그 전에는 소비자가 하지 않아도 되었던 노동을 대가의 지불 없이 강요한다는 것이다. 다만 정보통신 기술에 기초한 판매와 구매의 구조가 소비자에게 많은 선택권을 주고 있기 때문에 강요로 체험되지 않을 뿐이다. 종종 그 선택이라는 것이 이미 주어진 선택지에서 고르는 것임에도, 게다가 우리가 소비하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들이 판매자에게 엄청난 힘을 부여하는 데이터가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비교하고, 고르고, 선택하는 소비 과정이 주는 능동성에 현혹된다. ‘떠넘겨진’ 그림자 노동을 일종의 자유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램버트는 다음과 같이 핵심을 찌른다. 

“이제 기업들은 그림자 노동을 하는 고객에게 거래를 원만하게 처리하거나 물건을 구입할 생각이면 개인 정보를 내놓으라고 정기적으로 요청한다. 고객은 인터넷에서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서점이나 은행, 신문, 공공시설, 스포츠 팀, 의류 판매업자, 전화 사업자 등과 계정을 개설한다. 모두가 고객이 ‘계정’을 개설하기를 바란다. 이는 판매업체에게 연락처와 인구 통계학적 데이터를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모든 거래를 추적할 수 있게 해 주고 개인 프로필까지 만들어 준다는 의미이다. 판매업체들은 그 프로필 덕분에 ‘추천 엔진’을 작동시킬 수 있다. 아마존과 넷플릭스는 각자의 알고리즘으로 고객의 과거 구매 내력을 조사하여 고객이 좋아할 만한 책이나 전기스탠드를 추천하기도 하고, 고객이 빌릴 만한 영화를 추천할 수 있다.”(265-6)

 그림자 노동의 만연은 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생산, 판매, 유통 과정에서 밀려 난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 사람들은 계속 일해야 한다. 24시간 문을 닫지 않는 컴퓨터 속의 상점을 헤치고 다니며 쇼핑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다. 여기에 페이스북, 카카오톡, 텔레그램 같은 SNS가 근무시간과 퇴근후시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나타난 비공식적 노동의 연장이 더해진다. 비공식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임금은 지불되지 않는다. 항상 긴장하고 항상 무엇인가를 하고 있게 된다. 도대체 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해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관리해야 하는 수십 개의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관리하는 일쯤은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 자체가 엄청나게 신경 쓰이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림자 노동이 만연한 사회는 매우 기괴한 상황을 초래한다. 정보통신 기술에 의해 체계화된 사회의 위계질서의 상위에서 정보를 관리하고 처리한다. 그것을 통해 권력을 창출하는 사람들, 여전히 전문 직종으로 대우받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고액의 연봉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도 그림자 노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더 많이 일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떠밀려 자신들의 시간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토대는 사람들을 끝없는 노동의 트래드밀(treadmill)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많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내가 소비자로서 ‘자율성’과 ‘선택’이라는 착각 속에 수행하는 그림자 노동이 나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 정당하게 평가되어 임금을 받으면서 수행되어야 할 ‘나’의 노동이 ‘나’의 그림자 노동에 의해 사라진다.  

나의 선택은 정보가 되고 그것은 나를 지배하는 권력의 토대가 되며, 나의 일상과 나의 소비를 관리하는 힘이 된다. 기록된 정보를 통해 내가 거래하는 항공사는 나보다 나의 동선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만들어진 고객카드에는 내가 미처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하는 나의 기호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다. 이것은 특정 상품에 대한 할인쿠폰으로 돌아올 것이다. 다시 한 번 기묘한 상황에 맞닥뜨린다. 정보화된 사회, 사람들은 더 이상 대면 접촉을 하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한다. 사람들은 원자화되어 사회적 연대의 토대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상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플랫폼들에 저장된 정보에 의해 만들어진 ‘나’는 주변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수동적인 (능동적이라고 착각하는) 소비기계일 뿐이다. 능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개인이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엄청난 양의 정보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고도화되는 정보의 바다 속에 남겨진 나의 흔적을 독점하는 거대 주체들에 의해 감시되고 통제된다. 원자들로 잘게 쪼개어져 있지만 전체주의적 제도에 의해 통제된다.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을 넘어서기 위해 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1920년대 ‘사회주의 계산논쟁’이라는 학술적인 토론이 있었다. 이 논쟁은 오스카 랑에(Oskar Lange)와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라는 걸출한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핵심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아래서 재화와 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을 계산하는 것이 가능한 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논쟁의 결과가 사회주의 계산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던 것은 신고전파경제학의 균형이론이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가 ‘적’의 논리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다. 

이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매우 경직된 체제임이 드러났고 결국 붕괴했다.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였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가 지적한 것처럼 계획은 결코 정식화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선호(preferences), 즉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에크는 주류경제학자들이 신봉하는 일반균형이라는 신기루가 아니라 지식의 불완전성에 기대어 시장을 옹호하게 된다. 시장의 가격신호만큼 암묵적 지식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기제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정보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았고 그가 생각했던 공정한 거래의 이상은 권력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그의 눈을 흐리게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기한 암묵적 지식, 결코 체계화된 형태로 제시될 수 없는 사람들의 필요(needs)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한 실천적 함의를 가진다. 하이에크와가 제시한 지식론에 근거한 정 반대반향의 처방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직된 중앙 집중화된 계획은 권위주의적 체제로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일반균형이론에 근거한 사회주의 옹호는 전혀 실천적이지 못한 이론적인 주장이었을 뿐이었다. 하이에크의 지식이론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천적 지향은 하이에크와 달리 시장을 비판하고 보다 확장된 민주적 참여를 강조하는 것으로 향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불완전한 지식은 시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다 깊고 넓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원리상 민주적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해도 국가단위의 경제 운영을 모두 민주적인 토의에 맡기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어서 실현가능성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거대 기업들이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정보, 즉 소비자들이 시장 거래 속에 남긴 흔적이 새로운 판매를 위한 데이터로 종합될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갖추어져 있다면 그것을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경제 체제를 만드는 데 이용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한편에는 다양한 수준에서 마련된 다양한 형태의 민주적 토론에 의해 표출되고 종합된 질적 데이터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시장의 교환관계들 안에 남겨진 소비자들의 흔적으로부터 집적된 양적 데이터가 있다. 이렇게 양적, 질적으로 수집된 정보에 기반을 둔  ‘민주적인’ 계획경제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정치적 장벽은 높지만 기술적 장애물은 훨씬 낮아졌다. 그 사회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할 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그런 사회가 불가능한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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