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3. 앵무새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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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월가(미국 금융 산업의 중심지)에 세워진 ‘겁 없는 소녀상’ 이야기를 아시나요? 작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한 달 동안 세워두기로 했었으나 뉴욕시가 올해 2월까지 두겠다고 결정할 정도로 시민들의 인기가 폭발했죠. 두 손을 양쪽 허리에 대고 당당한 자세로 선 겁 없는 소녀상을 세운 주인공은 미국의 세계적인 투자회사인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SSGA)입니다. “미국의 기업들이 여성 임원을 늘려야 한다”는 설립 의도 또한 사랑스럽습니다. 

예술작품에서 활달하고 멋진 여성을 만나는 건 행복합니다. 제주의 뿌리인 설문대할망, 죽은 남편을 살리러 저승까지 다녀온 도발적인 농사의 여신 자청비는 가까운 여성상이죠. “스파르타 전사들은 강하다”는 사실은 세상 누구라도 인정하지만 그 이유까지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그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은 바로 스파르타의 여성들이었습니다. 스파르타도 군국주의(軍國主義)가 강했지만 일제처럼 가부장제로 똘똘 뭉친 군국주의가 아니라 여성성이 풍부했던 군국주의였습니다. 스파르타 여성의 위상을 자세히 보고 싶은 분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리쿠르고스 편을 보세요. 《앵무새 죽이기》의 소녀 스카웃도 활달하고 당당한 여성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책보다, 《앵무새 죽이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알리바마 이야기>(원제 : To Kill A Mockingbird)에서 더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앵무새 죽이기》는 성장 소설이면서 동시에 인권 소설입니다.  1960년에 출간되자마자 100주에 걸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죠. 1991년 <북 오브 더 먼스 클럽>과 미국 국회도서관이 조사한 결과 성경 다음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바꿔놓는 데 이바지한 책으로도 꼽혔습니다. 특히 편견과 독선에 물든현대의 많은 독자들에게 양심을 일깨워준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목에 쓰인 ‘앵무새’는 집안의 새장에서 키우는 반려조인 앵무새(parrot)가 아니라 미국 남부 지방에서 주로 서식하는 지빠귀류의 새로 ‘흉내쟁이지빠귀(mockingbird)’를 말합니다. 이 새는 다른 새의 울음소리를 곧잘 흉내 낸다고 합니다.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녀 봐야 그 사람 입장에 설 수 있고,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아버지 에티커스 변호사.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는 말을 해줄 어른은 주변에 없나요? 아마 쉽게 만나긴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여학생들에게는 《앵무새 죽이기》를 추천합니다. 부당함, 차별에 대한 불만들을 어루만져주니까요. 여학생이 받는 차별과 편견과 온갖 무형의 폭력은 사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벗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거니까요. 이러한 사정을 이해한다면 어른들의 폭력이 예전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들을 용서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런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어른들이 어느 지점에서 자빠지고 게을러져 버렸는지 철저히 이해할 필요는 있어요. 

여자 중학생이 가출하고 싶을 때

가출하고 싶은 데 남녀가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이유는 제각각이었습니다. 여학생들은 보통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차별받았을 때가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죠.

“엄마는 왜 동생들과 나를 차별하냐고 말했다. 동생들이 시험점수가 안 나와서 오면 괜찮아 잘했어 이렇게 말해주는데, 내가 동생들보다 시험점수가 잘 나왔는데도 마음에 안 들어서 속상해하고 있는데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 점수가 나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말했다. 나는 그저 위로받고 싶을 뿐이었는데. 엄마는 ‘첫째니까’ 그런다고 하면서 말대답하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가 오빠한테 옷도 사주고 사고 싶은 거 다 사주겠다고 해서 나도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는 ‘너는 오빠 입던 거나 입으라’고 했다. 그래서 왜 만날 새거 안 사주고 누가 입던 것만 입어야 하냐고 하니까 옆에 있던 아빠가 ‘그냥 사주라’고 했는데, 엄마는 끝내 무시하고 안 사줬다.” 

“언니가 내 물건 계속 써서 엄마한테 말했더니, 엄마가 ‘보태주는 것도 없는데, 그까짓 거 빌려줄 수도 있지’ 하면서 화냈다.” 

첫째니까 차별받고, 딸이니까 차별받고, 못생겨서 차별받고. 차별의 이유도 참 다양합니다. 제주에서 여성의 차별 문제, 특히 여학생에 대한 차별의 문제는 어른들이 정말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주제입니다. 한국 전체가 가부장적인 사회이지만, 제주는 그 무게감이 10배는 더 하지 않을까요? 조선시대 유배 왔던 양반들이 뿌려 놓은 성리학적 가부장제와 일제 강점기의 가부장제, 그리고 제주4.3사건을 통해서 폭발했던 가부장제. 제주의 여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남존여비를 내면화하였습니다. 혹 덩어리처럼 잘 떼어지지 않죠. 여성이 딸을 차별하는 건 일종의 ‘자기부정’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누르는 압력에 내면의 일부가 찌그러졌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인 사실은 제주가 여성의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음기(陰氣)가 강하기에 샤머니즘이 활발하고, 곡선의 기생화산인 오름이 여성의 형상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졌죠. 제주 올레는 어떻습니까? 숨어 있는 길을 조금 열었을 뿐이죠. 제주의 어디를 가든 여성성을 만납니다. 하지만 방문객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서 땅의 운명이 결정되는 걸까요? 제주의 여성성을 범하려 했던 헤아릴 수 없는 폭력의 역사! 이것이 과연 여중생만의 문제일까요?

저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높은 쪽에 있는 사람들, 남성, 어른들이 운동장의 정반대쪽으로 서둘러 뛰어가지 않으면 운동장은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저 또한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며 여성들의 위상과 처지를 현실화하는 데 공을 들이고 싶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가장 낮은 곳에는 여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러워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여기저기서 차별 받는 존재입니다. 누가 그들의 손을 잡아 줄까요? 포근함을 주어야 할 가정에서까지 차별받는다면 이 아이가 어디서 기를 펴고 다닐 수 있을까요? 

제주인이 통탄스러운 자기부정의 역사를 청산하려면 여학생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며, 그들에게 말할 때는 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 번쯤은 되돌아봐야 합니다. 무심코 던지는 차별적 언어에 질식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이 신음의 메아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어른도 뭣도 아니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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