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59) 노름하러 갈 때는 마누라 고쟁이 입고 가면 재수 좋다

* 소중기 : 고쟁이, 속옷, 내의(內衣)
* 입엉 가민 : 입고 가면
* 소망인다 : 재수 좋다, 소망 일다 

노름쟁이가 노름판에 갈 때는 제 아내의 아래 속옷인 고쟁이를 몰래 입고 가면 재수가 좋아서 돈을 딸 수 있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노름에 미치면 어쩔 수 없는 법. 그게 사실이라면 노름해서 돈 잃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따겠다는 욕심에서 궁여지책으로, 출산과 관련된 마누라 속옷을 슬쩍 훔쳐 입고 나가는 것이다. 별난 짓을 함으로써 요행수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속설을 바탕에 두고 나온 말이다.

노름이 무엇인가.

돈이나 재물을 걸고 주사위‧골패‧마작‧화투‧카드 따위를 써서 서로 돈 따먹기를 하는 행위다. ‘내기’ 또는 ‘도박’이라고도 한다.

통념상 내기는 일반인이 심심풀이로 음식이나 술을 걸고 하는 소규모인 것임에 반해, 도박은 돈을 걸고 노름꾼들이 벌이는 행위를 일컫는다. 노름은 어느 사회에서나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됐으며 조직적‧계획적인 행위이기 십상이라 법률로 금지함은 물론이다.

노름의 역사는 매우 오래다.

미국 콜로라도 계곡의 원시 유적, 아리조나주의 동굴 벽화에는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의 모습이 새겨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노름은 투전(投錢)이었다. 조선 영조 초기부터 성행해 당시 조정에서 투전은 도둑질보다 더 큰 해를 끼친다 해서 법률로 엄금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상집에서는 공공연하게 노름판이 벌어졌다. 슬픔에 잠긴 상제들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화투장을 돌리고 윷을 던진다. 하다 보면 밤샘으로 가기 일쑤다. 

상가의 노름은 관습처럼 되면서 관에서도 눈감아 주었다. 이를 기회로 많은 투전꾼들이 생판 모르는 남의 집 초상에 문상객으로 가장해 스며들어 노름을 즐겼다고 한다.

노름꾼이 제 마누라 속옷을 입고 가듯, 노름꾼들에게는 요행수를 노리는 기행(奇行)이나 금기(禁忌)가 있었다.
  
산신령에게 백일기도를 올리면 노름수를 가르쳐 준다고 믿었다. 산신의 이러한 가르침을 ‘육임(六壬)’이라 불렀으며, 노름판을 계속 휩쓰는 사람을 ‘육임한 놈’이라고까지 했다. 

노름 도중, 자기 돈이 남의 자리 쪽으로 굴러가면, 그 돈은 ‘동전(動錢)’이라 해서 따로 두고 절대로 쓰지 않았다. 이 돈이 남의 손으로 들어가면 자기 돈이 계속 흘려 나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까치집 가운데 가장 굵은 나뭇가지를 뽑아서 흐르는 물속에 넣고 거꾸로 밀어 올리면 노름판에서 돈을 따게 된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로 인해 노름이 성하던 마을에는 까치집이 남아나지 않았다. 까치집이 없는 마을을 ‘도박촌’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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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데 노름이란 게 묘한 것이다. 두어 시간만 하자며 시작한 게 밤샘으로 흐르고 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커지는 이상한 속성을 지닌다. 사진은 대표적인 한국 도박영화 <타짜>의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노름에 관한 속담이 더 있다.   

‘노름을 신 신을 때 봐사 안다’(노름은 신을 신을 때 보아야 안다)

달리기 경주에 마지막 결승선을 끊을 때 가 보아야 승자가 결정되는 이치와 한 맥락이다. 노름도 초장이나 중간 흐름으로는 예측 불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신을 신고 나설 때 보아야 누가 돈을 땄는지 알게 된다는 말이다. 초판에 잘 나가다가도 끝판에 이르러 호주머니를 달달 털어내는 수가 허다한 게 노름이다. 그러니 누가 돈을 따고 잃었는지는 신을 신고 나설 때를 보아야 안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곤 한다.

한데 노름이란 게 묘한 것이다. 두어 시간만 하자며 시작한 게 밤샘으로 흐르고 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커지는 이상한 속성을 지닌다. 노름판이 무르익어 거액이 왔다 갔다 할 때는, 집에 상이 났다는 전갈이 와도 ‘이제 곧 가마.’ 해 놓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 게 노름판이다.

'노름쟁인 망허여도 흥허진 못헌다'(노름쟁이는 망해도 흘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돈을 많이 따는 것 같아도 어간에 노름판에서 탕진한 재산에 맞서지 못한다. 더욱이 노름으로 딴 돈을 씀씀이고 헤프게 마련, 그게 어떤 돈인가. 사행심에서 거머쥔 돈 아닌가. 그러니 풀 쓰듯 펑펑 쓰게 돼 있다. 그러니 노름으로 흥하기는커녕 패가망신할 수밖에 없다. 결국 노름쟁이의 말로는 비참하다.

노름꾼들, 특히 주부 도박단들이 산속 은밀한 곳에서 판을 벌였다, 판돈이 억대가 넘는다는 보도를 대할 때마다 가슴 섬뜩하다. 한 집안에 망조가 든 것이 빤하기 때문. 불행은 눈앞에 있는 법이다.

노름은 돈을 따기 위한 행위이므로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망가뜨릴 것은 불 보듯 한 일이다. 노름은 과욕에서 나온다. 푼돈이나마 한 달에 얼마씩 적립하면서 성실히 살아가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실다운가. 부디 요행을 바라 노름판에 뛰어드는 우(愚)를 저지르지 말 일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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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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