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29) 빈 손을 위하여 / 박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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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또 한 번 쓰러지기 위해 나는 일어선다

나뭇잎 죄다 떨군 겨울나무의 의지처럼

시작은 언제나 그렇게 힘겹고 쓸쓸했다

등불을 밝히듯이 모든 사유들을 닦지만

남루한 모습은 끝내 지울 수가 없구나

지나온 우수의 길 위로 불 지피는 저녁놀

아름답다, 삶의 처연한 상처까지도 아름답다

곧이어 어둠의 깊은 장막은 내려질 것이고

마침내 그 무대 뒤에서 혼절할 한 사람. 

-박시교, <빈 손을 위하여> 전문

생의 굴곡을 어느 정도 돌아온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기를 쓰고 일어서려는 의지가 무엇을 위함인지, 그렇게 일어서면 어느만큼 가서 다시 쓰러져야 하는지도 짐작이 가는...그렇게 보이는 결과물을 위해서 한발 한발 생의 정점을 향해 가는 건, 슬픔이라 단정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희열이 될 수도 없는 것이리라.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언제나 그렇게 힘겹고 쓸쓸한 법,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저녁놀은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그 노을 어느 한편 지워지지 않는 모습으로 있는 남루.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생의 마지막 감정 위로 어둠의 깊은 장막이 내려진다. 그 장막 뒤에 드디어 쓰러져 누운 한 사람. 그 사람의 모습이 오히려 편안하다. 

쓸쓸함, 외로움, 누군들 이런 감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마는 생의 목적지가 빤히 보이는 지점에 선 자들의 감정은 다른 누구보다 훨씬 더 깊을 것이다.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봐도 바람만 가득 잡히던 기억, 앞날에 대한 희망보다 지나온 날에 대한 그리움에 노을의 아름다움조차 슬픔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노년, 쓰러지기 위하여 다시 일어서는 행위와 닦아낸 사유에 걸린 남루, 지나온 우수의 길 위로 불지피는 저녁놀의 모든 행위와 광경이 '아름답다'에 걸려있다. 마지막에 선 자가 보는 세상의 어떤 부분인들 아름답지 않은 게 있으랴. 결국, 삶의 처연한 상처까지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세상은 내게 단절을 고하는 것이다. 다시 일어서기는 했지만 그 일어서는 행위는 결국 완전한 쓰러짐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박시교 님의 시에서는 그런 그리움과 쓸쓸함이 전편에 흐른다. 마치 1980년대 말 리얼리즘 문학의 반대편에서 열병처럼 번졌던 서정윤님의 <홀로서기>의 시편들을 다시 보는 듯하다. 고독과 외로움에 침잠해 보지 않고서는 쉽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최저점을 담담하게 노래하는 님의 시편들은 그러나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나뭇잎 죄다 떨군 겨울 나무의 의지'야말로 가장 최악의 상태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가만히 귀기울여 보라. 어떤 다른 목소리보다 더 큰 울림이 전신을 흔든다. 연륜이라고 단정하기엔 너무 큰...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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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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