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영광이 위태롭고 우스꽝스럽게 매달려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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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9) 《맹자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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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 하나로 글 전체가 꼬여버리다

체육시간, 
우리는 자필평가 대신 수행평가를 한다. 
수행평가를 할 때 보면 
여학생과 남학생의 조건이 나뉘어져 있다. 
무슨 말이냐면 남자는 줄넘기를 3분 이상 뛰어야 A를 받을 수 있고, 
여자는 2분30초를 하면 A를 받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간을 나눈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눈 이유를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여자와 남자가 똑같은 조건에서 하기엔 체력이 ‘턱 없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여자도 체력이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그렇게 여자들의 한계를 단정지어버리는 것은 ‘굉장히’ 나쁜 것인 것 같다.  
- 어느 제주도 중학생이 쓴 글

이 글을 읽고 저와 학생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글쓴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았지만 왠지 ‘부사’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학생들과 수행평가 배점에 대한 남녀차이에 대해서 토론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나서는 학생이 글 속에서 사용한 어휘에 대해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체육 선생님께서 일을 키웠다는 것이 학생들과 저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학생이 배점방식에 대해서 질문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남녀 차이를 없애고 공통적으로 해달라는 요구도 학생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차분히 그 차이를 설명해주면 될 텐데, 굳이 ‘턱 없이’라는 부사를 사용함으로써 학생의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학생은 ‘굉장히’라는 부사를 쓰면서 주장의 타당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학생이 쓴 부사는 선생님이 쓴 부사와 호응을 이뤘다는 것을 보여주고,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도 차기 대통령 감으로 거론되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유력한 정치인이 수행비서를 성폭행했다는 고발을 당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질 일들을 예견합니다. 자신이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와 자괴감을 받았을 사건이기 때문이죠. 이제까지 일어났던 ‘미투 운동’과는 다른 국면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클 것입니다.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에게 지금까지의 미투 운동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체육선생님이 학생의 질문에 ‘턱 없이’라는 부사를 왜 쓰게 되었는지, 그 이면에 감춰진 맥락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턱 없이’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여지없이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습니다. 남녀의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용》이라는 책에서 자로가 공자에게 ‘강함’을 물었을 때 공자는 “북쪽지방의 강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남쪽지방의 강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아니면 너의 강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냐?”라고 되물음으로써 적어도 세 가지 강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턱 없이’는 남녀 신체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동일한 척도로 평가한다는 인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올림픽 종목에서 남자 종목과 여자 종목을 나눈 이유는 남녀 차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녀의 강함이 다르다는 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면 충분히 납득이 되었을 것입니다. 학생의 주장은 올림픽 역시 남자 컬링, 여자 컬링을 나누지 말고 컬링을 한 종목만 하자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충분히 할 만한 질문입니다. 같은 어른의 입장에서는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턱 없이’라는 부사로 산산이 부서진 것이 유력한 정치인의 낙마보다 더 가슴 아픕니다. 

‘턱 없이’가 그르친 건 남녀 차이만이 아닙니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를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치 어른과 아이가 동일한 조건에서 턱걸이를 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간에 ‘벽’이 하나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많은 벽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제는 이 벽이 모두 무너질 것입니다. 벽을 만드는 습관도 없애야 하고, 남과 나를 막아주던 벽이 모두 사라진 광야에서 스스로 우뚝 서야 합니다. 학생의 글은 엉뚱하게 다가왔지만, 최근의 충격적인 미투 운동을 대하는 우리 어른, 특히 어른 남자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맹자》는 좀 더 과감하게 주장합니다. 

명예와 영광이 위태롭고 우스꽝스럽게 매달려 있는 곳

“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시대에 부귀와 영달을 구하는 자들 중 그의 아내가 보면 부끄러워서 눈물짓지 않는 자가 별로 없을 것이다.” - 《맹자》, 「이루 하」 편 

사회가 만들어준 수많은 부귀의 벽을 아무 노력 없이 얻은 사람들이 천국처럼 살았던 춘추시대. 그리고 이 벽들이 여지없이 분쇄되어 이제까지 불로소득을 봤던 사람들이 모두 망해 길거리로 내앉았던 전국시대. 수많은 불로소득과 반사이익을 누리다가 길거리로 나앉은 사람들은 ‘소인’입니다. ‘군자’(君子)란 말 그대로 ‘제후(임금)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중 큰 아들은 ‘태자’(太子)라고 부르며, 작은 아들이나 서자들은 ‘공자’(公子)라고 불렀습니다. 태자는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노력 없이 임금이 되었고, 공자들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대부(大夫) 같은 귀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군자’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습니다. 당시 실존 인물이었던 철학자 공자(孔子)는 당시 천대 받던 농부의 자식, 장사치의 자식, 전과범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공부를 시켜서 그들을 군자로 만들었습니다. 신분과 상관없이 능력 있고 덕망 있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명예의 이름이 바로 군자가 되었습니다. 공자의 꿈은 바로 이들이 정치를 주도하여 ‘군자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공자의 꿈은 비록 현실이 되지는 못했지만,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지금까지 공자의 꿈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당시에 부귀와 영달을 구하는 자들이 어째서 아내를 부끄럽게 했는지 한 사내의 이야기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제(齊)나라에 처와 첩을 데리고 사는 남자가 살았다. 그는 나갔다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배불리 얻어먹고 돌아왔다. 아내는 남편에게 누구와 식사를 하고 왔는지 물었다. 남편이 말한 사람은 모두 부귀한 이들이었다. 아내는 첩에게 ‘남편이 외출하면 존귀한 사람들과 식사하며 술과 고기를 맘껏 먹고 온다고 하는데 집에는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으니 이상하다. 내가 뒤를 따라가 보겠다’ 하고 남편을 미행했다. 남편은 장안을 배회했지만 함께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털레털레 동쪽 성곽의 무덤가에 가서 제사지내는 곳에서 밥과 고기를 구걸했다. 음식이 부족하면 다른 곳에 가서 구걸을 더 했으니 이것이 바로 술과 고기를 배불리 얻어먹는 방법이었다. 아내가 돌아와 첩에게 ‘남편이란 우러러 바라보면서 일생을 마쳐야 할 사람인데,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라고 말하고는 남편을 원망하며 뜰 한가운데 앉아 얼싸안고 서럽게 울었다. 남편은 이런 사정도 알지 못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와서 교만을 떨었다. - 《맹자》, 「이루 하」 편 

《맹자》의 이 구절을 보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20대에도, 30대에도, 아이들이 다 초등학교에 간 지금 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명예로운 곳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서 맹자의 말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내가 부끄러워하지 않게 살아 온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지만 이건 맹자가 말한 군자의 조건은 아닙니다. 다만 소인을 면하는 조건일 뿐입니다. 군자라면 아내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고 자신만 아는 것에 대해서도 조신하게 행동’ 한다는 ‘필신기독’(必愼其獨, 줄여서 신독[愼獨])을 할 수 있어야 군자입니다.

2500년도 넘은 말이지만 역설적으로 2018년 우리나라에 필요한 낱말이야말로 ‘군자’가 아닐까요? 넓은 광장 앞에 홀로 서 있어도 부끄러울 것 없고, 어떤 자리에서 일하건 자리에 어울리는 일만을 하며, 시대정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합니다. 언제나 시민 곁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설령 원하는 자리에 앉지 못하더라도 항상 낮은 곳에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세심한 시선으로 관찰합니다. 부귀영화도 가난도 이 사람의 마음가짐을 흔들어놓지 못하죠. 

맹자는 왕의 면전에다 대고 왕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실정(失政)하면 쫓겨난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 집무실 이름을 위민관에서 ‘여민관’(與民館)으로 바꾼 것도 《맹자》의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린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민본주의 정치철학자 맹자 역시 계급차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군자의 정신’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습니다. ‘턱 없이’라는 부사는 뜻 밖에도 ‘군자’라는 낱말을 긴급하게 호출하고 있습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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