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10) 《손님》, 《빌리 엘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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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그림책 《손님》, 소설《빌리 엘리어트》. 사진=오승주.

대한민국 다문화 정책을 되돌아보게 하는 10대의 생각

본본과 수진이는 둘 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다. 본본의 아버지는 돈을 벌러 떠나고, 수진이의 부모님 둘 다 다른 나라에 돈을 벌러 가셨다. - 대정중학교 3학년 김별희

인터넷서점에서 ‘손님’을 검색하면 아래 끝부분까지 마우스를 내려야 찾을 수 있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바로 《손님》(느림보)입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손님》은 알고보면 초등학생, 중학생, 심지어 부모까지 가릴 것 없이 그림책으로 수업을 할 때 꼭 목록에 포함됩니다. 책 표지 한가운데 증명사진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이가 바로 주인공 ‘본본’이랍니다. 

이 그림책은 ‘다문화’에 관한 매우 깊은 성찰뿐 아니라 ‘제노포비아(xenophobia, 이방인 혐오)’까지 그려내고 있습니다. 제노포비아 현상은 사회의 밑바닥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더 약하고 처량한 제3세계 이주민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 이른바 ‘브렉시트(Brexit)’ 사태 당시 동영상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버스 뒷좌석에 앉은 술병 든 하층민이 피부색이 다른 이주민을 조롱하고 술을 부으며 괴롭혔죠. 이런 모습은 사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다문화 주제에 까불고 있네’라고 하며 괴롭히죠. 

《손님》은 한국 아버지를 둔 필리핀 소년이 필리핀 명절을 앞두고 돌아오겠다던 아버지의 방문을 기다리다가 수진이라는 뜻밖의 손님 때문에 분노하지만 ‘괴롭힘 사건’을 계기로 친구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원치 않은 손님인 수진이는 어떻게 본본과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본본은 처음엔 그녀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녀도 힘든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턴 손님처럼 대했다. - 김별희 학생 글

본본에게는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잊을 수 있다는 심리학이 작용했습니다. 본본은 한국 아버지를 두고 필리핀에 사는 아이지만, 수진은 한국에서도 필리핀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처량한 여자 아이입니다. 제가 본 많은 작품 속 인물 중에서 수진이처럼 처량한 건 권정생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에 나오는 절름발이 막돌이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본본도 그걸 알아차렸습니다. 

캐나다에서 6년 동안 살고 한국에 온 중학생 글쓴이는 우리나라에서 인종 차별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캐나다는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심한 한국의 분위기가 매우 낯설었다고 호소했습니다. 

우리도 캐나다처럼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편견의 벽을 부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조금 더 선진국으로 가지 않을까? - 김별희 학생 글

다문화와 선진국을 연결시킨 건 학생의 뛰어난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대한민국 미래의 매우 중요한 열쇠가 ‘다문화 가족’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다문화 정책은 ‘한국문화 동화정책’이나 다름없습니다. ‘민주화’라는 말처럼 ‘다문화’라는 말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니 조롱이나 놀림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이쯤 되면 다문화에 대한 중학생의 생각이 웬만한 어른보다 낫지 않나요?

친구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원수가 된 오래된 역사

“만일 투표를 한다면, 광부들은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올 걸. 그게 다 빨갱이 몇 놈들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거라구. 현실을 직시해야 해. 그들은 명분이 없어. 당연한 거 아냐? 어떤 탄광은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구. 너희 아빠 같은 사람더러 땅에서 석탄을 캐라고 주는 월급이 시장에서 석탄을 사는 것보다 더 비싸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겠니?”- 소설 《빌리 엘리어트》 에서 데비 아빠의 말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은 빌리의 발레 선생님의 남편(데비의 아빠)은 정리해고 정책을 지지하는 모순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럼, 아저씬 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 거죠?”라는 빌리의 날카로운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갓난애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뿐이었죠. 

《빌리 엘리어트》는 1984년 겨울 영국의 뉴캐슬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장마다 각각 다른 인물이 이야기하는 ‘다중 일인칭 시점’으로 기록되어 다양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줍니다. 보수당 소속의 영국 수상 대처는 ‘철의 여인’으로 유명합니다. 2기 집권에 성공한 직후 산업합리화를 이유로 20개의 탄광 폐쇄와 2만 명의 인력 감축을 담은 구조조정 안을 발표합니다. 이에 맞서 20만 명의 노동자가 1년 넘게 파업을 하다가 마침내 항복하고 말죠.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속 빌리의 형과 아버지는 파업을 하면서 침대와 피아노 등을 태워 땔감으로 써야 할 만큼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그림책 《손님》의 여자 아이 수진이가 필리핀의 어린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본본에게까지 냉대를 받은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왜 아이들은 친구가 되지 못했을까요?

경찰을 방패삼아 버스를 타고 일터로 들어가는 그런 놈들을 우리는 배신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같이 일했으며, 한때는 친구였던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학교 동창이거나 자식들이 함께 학교에 다녔거나, 하여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대여섯 겹으로 둘러싸인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버스를 타고 유유히 피켓 라인을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라. 고용주와 싸워야 하는 것도 모자라서 같은 노동자들과 싸워야 하다니, 빌어먹을! 나라도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을 것이다. - 《빌리 엘리어트》에서 재키 엘리어트의 말

“진정한 죄인은 그 어둠 속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영혼 속에서 어둠을 만들어놓은 사람”이라는 《레 미제라블》의 말을 기억해봅니다. 노동자가 동료를 배신하고 서로 원수가 된 것은 ‘권력자’가 이런 상황을 조장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로선 노동자들이 분열되는 것만큼 고마운 상황은 없으니까요. 수진이가 또래 남자애들한테 괴롭힘을 당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을 살뜰히 보살피고 친근하게 대해줘야 할 이유를 어른들이 만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빌리 엘리어트》의 어른보다 잘못이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시 큰 잘못인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제주도도 권력자에 의해서 수없이 분열되었고, 지금도 원수처럼 지내는 곳이 많습니다. ‘1948년 제주 4.3사건’(제주4.3)과 미국의 관계가 70년 만에 조명되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는 ‘서북청년단’이나 ‘이승만’ 같은 대상에 분노하는 데 머물렀습니다. 이젠 권력자 미국의 눈으로 볼 때가 되었습니다. 서북청년단원은 이북 지역에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족은 죽임을 당해, 김일성과 공산당에 대한 극도의 분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의 뜻에 따라 그들을 대거 제주도로 보냅니다. 고향인 이북에서 당한 일을 제주도에서 복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무자비한 학살극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때 제주도가 ‘빨갱이 섬’이라 매도되고, ‘북한 남로당 선동’ 같은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당시 세뇌의 슬픈 유산입니다. 학살이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서북청년단과 이승만이 지금도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제는 객관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미국의 도구 또는 하수인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미국이 한국에만 이런 ‘공작’을 했던 건 아닙니다. 미국과 다국적 기업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썼던 아주 일반적인 전략이죠. 칠레의 소아과 의사였던 아옌데(Salvador Guillermo Allende Gossens, 1908~1973)는 당시 위험할 정도로 높았던 ‘영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무상 분유 공급 제도를 내걸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시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뜨거운 열망이 칠레를 가득 메울 정도였죠. 하지만 다국적 기업인 네슬레(Nestle)는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칠레에 분유 판매를 끊었습니다. 영아들이 죽든지 말든지...이런 이유로 지금도 의식 있는 사람들은 ‘네스카페’ 같은 네슬레 제품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국 정부 역시 CIA를 통해서 칠레의 반대파인 피노체트 군부에 막대한 돈을 지원해 쿠데타를 이끌어냅니다. 이때도 미국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죠. 쿠데타 이후 칠레에 잔혹한 피바람이 몰아쳐 시민 3197명이 학살되고 1197명이 실종됐으며 13만 명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는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출신의 학자들, 일명 ‘시카고 보이스’를 대거 경제 관료로 임명했고 칠레는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실험장이 되었죠. 결과는 어땠을까요? 실적은 형편없었고 경제는 더욱 곤두박질쳤고 1982년 외환위기까지 닥치자 피노체트는 시카고 보이스들을 퇴출시키고 동아시아처럼 전면적인 국유화로 전환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이 죽인 전 대통령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 덕분에 파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깝게 강정마을 사례가 있습니다. 해군기지를 건설할 당시 강정마을 공동체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보상금’을 빌미로 마을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었고, 친척이나 오랜 친구들끼리 삿대질을 하면서 급기야 원수가 되었죠. 당시 정권과 정보기관이 주민 분열을 조장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졌습니다. 최근에는 군 사이버사령부가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해 강정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아간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아이들이 약한 아이나, 다문화 친구를 괴롭히고 인종차별이 익숙하게 일어나는 까닭은 일종의 ‘차별적 공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친구와 오랫동안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역사인식과 정치에 대한 이해로 그들 앞에 높인 ‘사악한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빌리 엘리어트》의 혹독한 겨울은 어떻게 지나갔나?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편견 없이 사이좋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손님》과 《빌리 엘리어트》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역시 ‘화해’입니다. 본본과 수진은 서로의 상처를 알고 나서 화해했고, 본본은 수진이를 ‘손님’으로 인정하면서 이야기가 끝납니다.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로얄 발레학교에 시험을 치러 가는 비용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해하던 그 순간 ‘배신자’로 비난받던 친구가 찾아옵니다.

초인종 울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 준 것은 나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학창 시절 토니의 친구였던 게리, 게리 스튜어트였다. 우리가 전에 슈퍼마켓에서 보았던 그 친구요, 탄광에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이게 누구냐고 묻던 그 친구 말이다. 알다시피, 바로 그 배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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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다 놓을게요. 아저씨가 오죽 절박했으면 파업을 깰 생각까지 했겠어요. 어쨌든 빌리는 기회를 줄 만해요.” - 《빌리 엘리어트》에서 재키 앨리어트의 말

아버지는 빌리의 발레 재능을 알았지만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배신자 버스’에 올라타 큰아들 토니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참 가슴 아팠어요. 가장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거든요. 싱거운 결론이지만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빌리는 가족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능에 최선을 다했고,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는 무엇이 과연 빌리를 위해 최선인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그 때문에 고통 받았습니다. 형 토니 엘리어트는 아버지가 무너지지 않게, 그리고 노조가 무릎 꿇지 않게 최선을 다했고, ‘배신자’ 게리 역시 모욕을 당했음에도 도움의 손을 건네는 최선의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다면, 어떤 사람도 둘 사이의 끈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최선과 이해. 이것이 바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돕는 방법입니다. 

《손님》을 읽고 글을 남긴 학생의 말처럼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편견의 벽을 부셔버리려면’ 항상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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