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84)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역, 동문선, 2010.

898038596X_f.jpg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역, 동문선, 2010. 사진=알라딘 홈페이지.

1. 대전환의 시대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들의 몰락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속에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해 온 한 정치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침몰했다. 그의 파렴치한 범죄 혐의는 우리가 함께 몸담았던 지난 시대의 모습 전체가 거대한 허상이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우리가 딛고 선 지반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는 불안감을 갖게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모두가 예상한 것이었음에도 막상 전직 대통령의 다양한 범죄 혐의가 구체적으로 나열되자 이제서야 정의가 실현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더불어 묘한 자괴감이 느껴졌다. 전혀 상반된 길을 걸어 왔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정치인들이 결과적으로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었던 인물로 판정이 난 것이다. 이 두 인물의 몰락은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한다.

정의를 실현하리라고 여겼던 정치인은 사실은 불의를 저질렀다. 국부를 증대시킬 것이라고 여겼던 정치인은 자신의 금고를 채웠다. 이들은 정치적인 지향은 달랐지만 무엇인가에 사로잡힘으로써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시대는 그렇게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사람이 권력을 휘두를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그동안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문명적인 단계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진전이 어떤 탁월한 리더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사실은 처음부터 포기해서는 안 되었던 우리 자신의 중요한 가치를 눈에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를 야만에 머무르게 한다. 그가 남들보다 진실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가 모르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나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수치심을 느끼게 할지라도 그런 사소한 것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여기게 된 것이다. 내가 나의 상처와 모욕을 감내할수록 그의 권위는 커지고, 폭력과 잔인성은 일상화된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남들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그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교수가 대학원생을, 의사가 후배 의사를, 극단장이나 감독이 배우를 무시하고, 폭행하고, 희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생계에 대한 위협으로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가 우월한 지위에서 사태를 더 잘 보고, 더 잘 알기 때문에 그가 그럴 권리가 있다는 기만적인 승인을 통해 폭력을 감내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더 나은 앎이란 거짓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업무가 아니라 타자를 괴롭히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자기 자신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자신이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조직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폭행하고, 나를 모욕하는 우월한 지위의 사람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중단할 것을 말할 수 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와 관습이 갖추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2. ‘너 자신을 돌봐라’

미셸 푸코의 책을 읽다보면 매우 암울한 기분이 든다. 그에 의하면 근대 이후 우리는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모두가 강제당하는, 아무도 감시하지 않지만 모두가 감시당하는 거대한 규율의 체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을 길들여 왔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자유가 아니며, 우리가 주체적이라고 여기는 것 역시 사실은 타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규율하는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나는 결코 규율을 벗어나고자 하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근대라는 효율성의 괴물은 ‘나’를 만들었고, 나는 다시 그 효율성의 체계를 지속시키고 연장시키기 위해서만 살아간다. 이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가치들은 근대의 완성과 더불어 몰락한다. 남은 것은 평등한 부자유일 뿐이다. 

푸코는 자신의 사상이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독자로서는 그에게 도대체 정치적 대안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체의 해석학』은 1981년과 1982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한 것을 묶은 책으로 그런 물음에 대한 푸코의 대답을 포함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대답은 ‘너 자신을 돌봐라’이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은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푸코의 재해석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훌륭한 정치인이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너 자신을 돌봐라’라는 말은 그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이다. 

푸코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라는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격언이 가진 참 뜻을 ‘너 자신을 돌봐라’(epimeleia heautou)라는 말에서 찾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에서 앎에 관한 말은 사실은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실천과 무관하지 않은데, 데카르트가 앎의 문제를 오로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문제로 부각시킨 근대 이후에는 앎과 실천의 문제는 분리되어 후자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자기인식의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너 자신을 돌봐라’라는 자기배려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푸코는 서양의 지성사에서 보이지 않게 이어져온 실천과 수련의 역사를 추적한다. 

진실은 아무에게나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체는 “정화, 자기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주체의 해석학》 58쪽) 등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은 철학과 구분해서 ‘영성’이라고 불렸다.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59쪽)된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자기배려에 대해 말한 것은 그가 훌륭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내거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무지에 대해 수치스럽다고 토로하자 소크라테스는 “걱정하지 말게, 수치스러운 무지 속에 있다는 것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50세에 깨달았다면 그것을 치유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배려를 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하지만 너는 그것을 깨달을 적정한 나이에 있다.”(76쪽)라고 답한다. 

오늘날 자기를 돌보는 문제는 근대가 만들어낸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효율성을 실현하기 위한 거대한 감시체계는 끊임없이 나의 삶을 이윤에 결부시킬 것을 강제한다. 푸코는 세네카를 원용하면서 그런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상당수의 책무를 부과하고 거기로부터 이득(재정적 이득, 영광, 평판, 쾌락과 생활에 관련된 이득 등)을 얻으려 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책무-보상의 체계, 채무-활동-쾌락의 체계 속에서 삽니다.”(303쪽)

푸코가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자기 배려의 방법은 독서, 글쓰기, 자연을 응시하고 탐구하는 것, 요가나 태극권과 같은 수련 등이다. 우리 자신을 이렇게 형성하고 변형시켜 나갈 때 우리는 근대 권력의 미시물리학이 만들어낸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주체의 권리를 빼앗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충고였지만 그 연관 고리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지배욕, 성욕, 물욕 등에 사로잡힌 권력자가 자기를 돌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에 덜 몰두하게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그럴듯하다. 

173956_198115_3829.jpg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