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85) 김보영 외, 《SF 크로스 미래과학》, 우리학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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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SF(Science Fiction)는 주로 ‘공상과학소설’로 번역되곤 했다. 최근에는 이 용어보다는 ‘과학소설’로 번역한다. 언뜻 보기에 두 단어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공상(空想)’이란 말이 사전에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 또는 그런 생각.”이라고 풀이된 것을 생각해보면, 의미의 차는 상당히 크게 느껴진다. 과학이란, 공상과 달리 이성과 지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과학소설에 공상이란 말이 붙어 불가피하게 ‘공상과학’이나 ‘공상소설’이란 의미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모두 과학이란 단어의 함의와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공상’이란 단어의 뜻이 ‘허구’나 ‘상상력’에 가깝게 쓰였다면, SF의 본질적인 한 특성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많은 SF 작품들이 환상소설과 경계가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SF에서 비현실적이고 실현될 가망이 없어 보이던 한낱 ‘공상’이 현실이 되고 실현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게 되자 차라리 ‘공상’이란 말이 가짜가 되었다. SF만큼 현실적인 문학 장르가 있을까 싶다.

삼성과 애플이 디자인 특허 소송전을 벌일 때, 삼성은 갤럭시탭이 아이패드를 베낀 것이라는 애플 측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SF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을 증거로 삼았다. 1968년에 나온 이 영화에 오늘날의 태블릿 PC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뉴스패드’라는 영상 장치가 이미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성 측의 주장이 타당한지 여부를 떠나서 적어도 우리는 SF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실감하게 되었다. 

SF에 등장하는 과학기술과 미래사회는 공상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서 출발한 미래의 예측도이다.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 인터넷, 무인 운송수단, 3차원 인쇄, 나노기술 등 정보통신기술(ICT) 기술을 위시하여 새로운 기술들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주장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이에 대해서 과거 창조경제 담론의 되풀이라는 비판도 있고, 외국은 그렇지 않은데 한국에서만 유독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냉소도 있다. 이 타당한 비판들을 경청해야할 것이다. 또한 4차 산업혁명론자들의 예견만큼은 기술적 발전에 따른 급격한 사회 변화 또는 경제적 이익을 기대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의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래의 과학기술을 향한 기대만큼이나 불안 역시 우리 사회를 잠식해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미래를 향한 기대와 불안에 기대어 한몫 잡으려는 가짜 장사꾼들을 가려내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미래의 과학기술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과학기술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것은 전문 과학기술자의 역할에 달린 것인지 모르지만, 과학기술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영향력은 모두의 몫이기 때문이다. 

《SF 크로스 미래과학》은 이러한 시점에 읽어볼 만한 교양도서이다. 아마 본래는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책이겠지만 성인 독자들도 두루 재미있게 읽어볼 수 있겠다. 책 제목이 알려주는 것처럼, 이 책은 김보영, 김창규, 곽재식, 박성환 네 명의 SF 작가들이 콩트나 엽편소설(葉篇小說)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짧은 스물다섯 편의 SF 작품을 싣고 과학 칼럼니스트 하리하라의 친절한 해설을 덧대는 방식의 구성을 취했다. SF 소품들을 먼저 읽고 여기에 그려진 미래과학과 미래사회에 대해 추가적인 설명까지 읽을 수 있으니 과학기술 때문에 SF 장르가 낯설거나 어려운 독자들도 읽기에 큰 부담이 없을 것이다. 

청소년과 대중 독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해서인지 이 책에 실린 SF 작품들은 대부분 아주 먼 미래의 과학기술과 사회상보다는 최근의 첨단기술과 사회적 이슈에 관련된 소재들이 많은 편이다. 이를테면, 우리를 위협하는 미세먼지는 과거에는 SF에나 등장하던 디스토피아적 현실이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현실이다. SF 작가들은 지금의 현실에서 어떤 상상력을 발휘할까?

김보영의 <괜찮아, 시골은 안전해>는 미세먼지로 인해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공해 난민’이 속출하는 근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삼는다. 공기 오염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자 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시골로 피난을 간다. 이른바 ‘친환경 마을’은 화석 연료의 반입이 금지되므로 스스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에너지를 만들어야하고 생활의 많은 불편이 뒤따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조건 ‘맑은 공기’를 택할 수밖에 없다. “좀 더 아끼고, 좀 더 적게 쓰고, 좀 더 쓰레기를 덜 만들면서”(88면) 사는 삶이다. 최악의 미세먼지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너무도 확연하게 예측되는 미래의 현실이다.

그러나,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예측이 어려운 사안도 있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한 소설가가 서로 다른 상상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보영의 「왓슨 의사 선생님, 셜록 판사님과 친구시죠?」는 인공지능 로봇이 일상에 확산된 근미래 상황을 다룬다. 인공지능 판사는 인간보다 더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고, 의과대학에서는 인공지능 의사의 도입 때문에 신입생 수를 대폭 줄이게 되었다. 주인공 민주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생각하며 선생님이란 직업이 남아 있을지, 아니 세상에 남아 있을 직업이 뭐가 있을지 의문에 휩싸인다.

그런가 하면 같은 작가가 쓴 <2025년의 건강 유지법>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150~200년에 가까워진 탓에 학계에서 ‘주기적 의무교육’을 제안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10년만 해도 지식이 쓸모없어지기 때문에 50년에 한 번은 학교에서 재사회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러면 학교도 두 배로 늘고 선생도 더 필요하지 않겠는 생각에 교사인 주인공은 반가워한다. 

두 가지 상상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맞을까? 어쩌면 둘 다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교육은 많은 경우 인간 교사 대신 인공지능 로봇이 행하지만, 더 많은 교육과 질 높은 다양한 교육이 필요한 사회가 되어 여전히, 혹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은 인간 교사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미래를 모른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SF라는 창을 통해 미래를 미리 엿볼 수는 있다. 어쩌면 그 창을 통해 밝은 미래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밝은 미래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또 없다. SF와 접속하는 일은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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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대원 제주대 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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