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63) 뱀 본 새

* 배염 : 뱀[蛇]
* 생이 : 새, 참새

새가 뱀을 보면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하면서 날개를 파닥이며 요란스럽게 재잘거린다. 징그러운 경계색을 띤 데다 웅크려 똬리를 틀거나 잽싸게 기어가는 모습이 위협적이라 그럴 것이다. 본능적이지만 꽤나 시끄럽다.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뱀이 얼마나 흉물스러운가. 겁을 먹고 어쩌지 못해 소리치며 뭐라 뭐라 마구 해댄다. 아직 철들지 않은 아이들이라 유별난 동물을 눈앞에 놓았으니 그럴 것이다.

천성이 그런가. 사람들 중에는 주책없이 입을 놀려대는 이가 있다. 가당치 않은 일이다. 이 속담은, 조금만 별난 것을 보면 입을 놀려대는 대범하지 못하고 가벼운 언동을 나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어른답지 못한 소인배의 기질을 꾸짖음이다.

지금도 어른들이 기이한 것을 봤거나 유별난 일을 대할 때, 들은 말을 속에 놔두지 못하고 입방아 찧는 사람을 향해 너무 ‘조잘거린다’고 대놓고 나무란다. 

‘배염 본 생이’란 비유가 얼마나 실감나는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버릇을 꾸물거리는 뱀을 앞에 놓고 다가가지는 못하면서 요란 떠는 새에 빗댔으니, 음미할수록 적절한 비유라 실감 난다. 제주사람들에겐 이런 타고난 수사(修辭)를 구사하는 DNA가 있는 모양이다.

쓸 데 없이 수다스럽게 지껄이는 말을 요설(饒舌)이라 한다. ‘饒’ 자가 ‘넉넉하다, 풍요롭다’는 뜻인데, 삶이 풍요로운 게 아니라 ‘말이 풍요롭다’ 함이니, 말을 많이 함이다.
  
입이 가볍고 침착하지 못해 경망스러운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이런 감각적이고 탁월한 표현을 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이 속담은 충분히 놀랄 만하다.

사람의 언행 가운데 민망한 것이 ‘입방아 찧기’다. 소인배의 속성이라 더욱 거슬린다. 말을 하는 입장에서야 쉽게 말을 하겠지만 상대가 받는 상처는 깊은 법이다. 구설수처럼 사람을 곤욕스럽게 하는 것도 없다.

속엣 말 하고 나면 후련함을 느끼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후회와 번민을 어찌할 것인가. 선량하고 양식 있는 사림이라면 언제나 조심, 조심, 입조심할 일이다.

입방아도 단속하는 세상이다.
  
최근 신축한 반포의 새 아파트에 판‧검사, 변호사들이 많이 입주했다. 서초동 법조단지와 반포 아파트 중간에 위치한 메리어트호텔의 헬스클럽이 이들 판‧검사, 변호사 아지트인데, 이곳에서 이들이 입방아를 찧고 있다.
  
“박근혜가 어쩌구 저쩌구….”
“이명박이 어쩌구 저쩌구….”
“문재인이 어쩌구 저쩌구….”
 
이 소식을 접한 서울 서초경찰서 정보계가 사복형사를 파견해 첩보를 수집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군, 국가정보원, 경찰이 사회동향 파악과 첩보 수집 활동의 3대 축이었으나, 군과 국가정보원을 견제하려는 문재인 정부 시대에는 경찰의 권한과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말이 많은 것은 다변일 뿐 결코 달변이 아니다. 말은 아낄수록 보배롭다. 많은 말이 해로우니 하지 말라고 ‘말’을 경계한 고시조가 있다.

말하지 좋다 하고 남의 말은 말을 것이
남의 날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작자 미상)
사회란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자연 거기에는 의사소통을 위한 말이 오가기 마련이다. 음성적으로는 똑같은 말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가 있어서 ‘어’해서 다르고 ‘아’해서 다르다고 한다. 불가에서도 삼독(三毒) 중 제일 악업이 구업(口業)이라 경계한다. ‘입은 재앙의 근원’이라 함이다.

유교사상에 도덕적 뿌리를 내리고 있던 중세 우리 사회에는 언행의 기준을 예(禮)와 선(善)에 두고 있었다. 그러하므로 말과 행동에 여간 조심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군자의 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시조 역시 이러한 교훈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물론이다. 예전뿐 아니라, 인권존중을 제일로 하는 오늘의 사회에서도 본받아 마땅한 일이다. 사람으로서 품위를 지키려면 다른 것에 앞서 쓸 데 없이 조잘대는 입방아 찧기부터 삼가야 하리라.

'배염 본 생이' 모양으로 하잘것없는 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입 놀려 조잘거리는 것처럼 경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난센스 퀴즈 하나다. 

“떡은 떡인데, 입방아 찧어야 만들 수 있는 떡은 뭐게?” 
답은… ‘쑥떡쑥떡!’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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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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