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31) 비누/ 이우걸

noname01.jpg
▲ ⓒ 김연미

이 비누를 마지막으로 쓰고 김씨는 오늘 죽었다.
헐벗은 노동의 하늘을 보살피던
영혼의 거울과 같은
조그마한 비누 하나.

도시는 원인모를 후두염에 걸려 있고
김 씨가 쫒기며 걷던 자산동 언덕길 위엔
쓰다 둔 그 비누만 한
달이 하나 떠 있다.

-이우걸 님의 <비누> 전문

한 때, 글을 쓰던 이유가 분명 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 소설, 혹은 수필, 장르를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전하고자 했던 내용이 시에 적절하다면 시를 썼고, 소설처럼 극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소설적 구성을 빌어다 썼다. 명확한 구분을 원하는 사람들이 볼 적에는 이건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제 멋에 겨워 쓰는 낙서라고 해도 우린 상관없었다. 우리 스스로도 그냥 '글'이라고 했었으니까.

그렇게 형식을 무시하면서까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정의'였다. 진실과 진리가 통하는 세상이었다. 약자들 편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스스로 눈을 그쪽으로 고정시켰다. 그 반대편에 '순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글쓰기를 폄하하던 사람들도 있어, 툭하면 이론논쟁을 일삼기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생각에 상대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젊은 혈기, 혹은 치기라고, 세월이 이만큼 지났어도 그렇게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글쓰기의 목적은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물론 행동과 사고의 괴리에서 오는 부끄러움은 더 많이 쌓였지만...

40이라는 나이를 넘기고 다시 시작한 글쓰기에서 장르 구분은 이제 확실해졌다. 아직까지 20대의 혈기를 간직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일종의 안주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가장 제한적이고, 가장 함축적인 장르를 선택했다고 해서 글쓰기의 목적이 달라지지 말아야 하는데, 여지껏 걸음조차 떼지 못하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향기나는 꽃밭만 겉훑기 구경을 하고 있었다. 20대때 밤새 논쟁을 벌이던 순수쪽에 가까운 글을 배우면서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이게 장르의 한계는 아닌가, 아니면 100% 실력의 한계인가를 고민하며, 아무리 둘러봐도 다들 다 고만고만한 작품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8,90년대의 피뚝뚝 묻어나는 시어들을 들고 3장 6구 45자를 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우걸님의 <비누>는 이런 내 고민의 핵심을 한꺼번에 풀어놓은 작품이었다. 아,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쓰시는 분들도 계시는 구나. 내 머리를 한꺼번에 흔들어 놓고 밤새 놓아주질 않았다. 그동안 그런 작품이 없다고, 그렇게 쓸 수가 없다고, 투덜투덜하던 내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체험에서 나온 하나의 사실을 앞에 앉은 사람에게 이야기 하듯이 풀어놓은 두 수짜리 <비누>는 노동자의 죽음과 그가 마지막으로 쓰고 간 비누와, 그 비누만한 달이 삼위일체가 되어 선명한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려낸 그림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필요없는 것이었다. 

작가에게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을지도 모를 그 노동자의 죽음 앞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겠는가. 나라면, 노동자의 비참한 삶과, 그 삶의 이유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뭐 그런 이야기까지 한꺼번에 다 담아내려고 끙끙 대다 결국 한 줄도 못쓰고 지레 포기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을 비누 하나에 시선을 주고, 그 비누만한 달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독자는 선명하게 그 노동자의 모든 이야기들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어를 진정으로 낭비하지 않으면서 시대의 요구에 응답이 되는 현실적인 제재들을 지적이고 미학적으로 노래하려 애써왔'다는 이우걸님의 자평이 새삼 느껴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시를 쓰는 이유,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자신의 심리를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내고, 거기에서도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우라도 잘라내야 하듯이, 글을 쓰려 마음 먹었다면 그 글이 다른 이들에게도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될만한 그런 글을 써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 김연미(시인)  

a1.jpg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