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19)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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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 갈매기는 과연 뒤로 날았던 것일까?

저는 성산포가 고향입니다. 겨울 성산포 바다에 가보셨나요?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동네를 씻어 없애버릴 기세로 쏟아집니다. 바람도 주변 바다의 응원을 받아서 기세등등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제기차기나 배드민턴을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가장 매서운 바람은 겨울철에 붑니다. 겨울바람이 부는 날 성산포 바다를 가로지르는 갈매기를 보셨나요? 날개를 힘껏 저어서 날고는 있지만 뒤로만, 뒤로만 갑니다. 

저도 청소년 시절엔 뒤로 날던 갈매기였습니다. 어머니 표현에 따르면 징그럽게도 오래 속 썩이던 시절이었죠. 10~19세. 정확히 10대의 시간 전부를 방황하는 데 썼습니다. 학교 공부도 뒷전이고 독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공백은 대학에 가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비교적 최근까지는 그 시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40년이 흐르고 났더니 제가 그 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성산포 갈매기도 사실은 앞으로 가고 있었던 겁니다. 단지 뒤로 가는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압니다. 지혜로운 부모만이 자녀가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녀 이야기만 나오면 불평불만과 부정적인 말을 늘어놓는 부모님, 아이의 최고 장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당황하며 그런 거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부모님, 당신들은 자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저는 최소한 부모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이야말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근거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최소한 ‘선택당하는 삶’이 아니라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산포의 갈매기는 바람을 등지면서 날았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왜 굳이 맞바람을 뚫고 나아가려 했을까요? 갈매기가 선택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든 곳으로 내려가면, 몸을 숙이면 데미안의 모습이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나도 시련의 극복, 깨달음을 통해 완전한 자아에 이르고 싶다. 나는 싱클레어처럼 밝은 세계 속에 살고 있지만 나도 언제든지 어두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번쯤은 나도 어두운 세계로 들어가서 카인의 표적을 얻고 싶다. 그렇게 하면 더욱 성장할 수 있을 것 같고 내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한 중학생의 《데미안》 독후감 일부
어둠의 세계 앞에서 망설이는 10대의 마음을 잘 표현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한편 가슴이 아팠습니다. 글쓴이는 자기 내면으로부터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망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망설였을까요? 10대 청소년이 어둠의 세계, 즉 ‘존재의 심장’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압력이 매우 거세기 때문입니다. 

괴물로 변신한 아이와의 추억

카프카의 《변신》은 20세기 초에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20세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칼럼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문학 작품들은 20세기의 이야기입니다. 20세기는 인류의 사춘기와 같은 시대이기에 10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프카는 20세기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광가이드’에 비유합니다. 《변신》은 20세기를 여행하기 위한 가이드북인 셈이죠. 기계 문명에 의한 인간 소외, 개인과 사회의 대립, 세계대전과 대공황·혁명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공동체는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의 목숨이 총알 하나와 같다면 도대체 인간의 존재라는 게 어떤 가치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질문을 고통스럽게 추구했던 문학과 예술, 철학 전반의 흐름을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카프카는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었습니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지만 가족의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하기 싫은 영업 일을 하면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새벽에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가야하고, 자신이 기차를 잘 탔는지 감시하는 소년까지 있었죠. 그레고르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사회의 일원이자 가족으로 ‘소속’ 되어 있었고, 자신이 해야 할 ‘약속’을 수행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저 할 뿐이죠. 이 사회에서 편안히 살아가려면 존재를 억눌러야 합니다. 그레고르는 존재를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에 흉측한 괴물로 변신하고 말았습니다. 앞서 소개한 중학생의 글에서 ‘망설임’이 보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서 누가 감히 ‘소속’을 박차고 튀어나올 수 있으며, ‘약속’을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아침 8시~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 때문에 글을 쓸 수 없었던 프란츠 카프카는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을 앓았습니다. 인간의 실존적 위기를 중심 테마로 둔 그의 작품 세계는 어둡고 음침하고 지리멸렬하고 난감합니다. 

‘아아, 세상에! 나는 어쩌다 이런 고달픈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 허구한 날 여행만 다녀야 하다니. 회사에 앉아 실제의 업무를 보는 일보다 스트레스가 더 심하다. 게다가 여행할 때의 이런저런 피곤한 일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기차를 제대로 갈아타기 위해 늘 신경을 써야 하는 일, 불규칙하고 형편없는 식사, 상대가 늘 바뀌어 결코 오래 갈 수 없는 만남과 결코 진실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적 교류 등등. 악마여, 제발 좀 더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다오.’ 배 위쪽이 약간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에서
공부방을 하면서 《변신》의 그레고르를 닮은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공부를 잘 했고 감성적이었지만 소문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성친구가 자주 바뀌었으니까요. 저는 그 아이에게서 ‘표적’을 보았죠. 해야 할 공부량을 일찌감치 마치고 함께 음악을 듣거나 시를 썼습니다. 그의 ‘존재’와 대화하려고 애썼고, 저 역시 소속과 약속에 익숙해진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던 시름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입니다.

저는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도 함께 하길 은근히 바랐습니다. 못할 것은 없었지만 아이 부모님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장시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원에 등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아이를 데리고 소속과 약속의 세계로 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두 해가 지나고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징계와 강제전학. 그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간만에 제 공부방을 찾았습니다. 부모님과의 기나긴 전쟁이 있었고, 아이의 ‘존재’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매우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아이는 변신을 하였고, 어쩌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괴물 취급’을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 때문에 많이 지쳐 보인다. 부모님은 이제 좀 달라지셨니?”
“(긴 한숨) 언제쯤 그런 날이 올까요?
- 한 중학생과의 대화
짧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지만 깊은 여운이 남았던 그날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지지합니다. 그 아이의 ‘존재’를 매우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10년 동안 뒤로 날던 성산포 갈매기였고, 많은 어린 갈매기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소속과 약속 대신 아이들의 ‘존재’에 주목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아무리 억압하고 가두어도 ‘존재’는 죽지 않습니다. 마치 봉인된 손오공처럼 존재는 천상을 부실 수도 있고, 거악(巨惡)으로부터 약자를 수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를 억누른 결과, 뒤틀린 존재들이 뒤늦게 고개를 쳐드는 모습을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과거 신정아 씨와 스캔들을 일으켰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천재 소리를 들으며 주위의 온갖 찬사를 받다가 최순실 국정농단의 핵심으로 한국 정치를 어지럽힌 우병우 전 민정수석, 그리고 사상 최악의 갑질을 일으킨 대한항공의 가족들. 이것이 뒤틀린 존재의 ‘얼굴’입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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