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20)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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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청소년의 말 못할 고통

학교에 식칼을 들고 와서 소동을 벌인 아이가 있습니다. 친구가 괴롭히자 홧김에 벌인 행동이었습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아이는 모든 일들을 자신에게 불행하게 해석했습니다. 물리적인 폭력, 언어폭력 모두 그 아이의 일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이는 거짓말과 도망 전문가였습니다. 석 달 같이 수업하는 동안 서너 번 정도 수업을 들었을 겁니다. 아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고 동생들에게도 왕따를 당했습니다. 동생들이 형과 오빠로 취급을 해주지 않는 것을 가장 고통스러워했고 복수까지 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폭언을 퍼붓는 경우가 많았고 초등학교 저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의 대화는 단절되었습니다. 

세 번째 아이는 선생님을 물리친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자신들을 괴롭혔던 선생님과 전쟁을 펼쳐서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선생님은 한 학기도 채우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전출을 가고 말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들은 이 사건에 대한 일말의 양심도 없이 그저 통쾌한 승리의 기념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아이와 잘 지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기분 좋을 때는 떠들고 장난치고 수업을 방해하다가 제가 몇 번 지적했더니 수업 시간 내내 불평하는 소리를 냅니다. 친구들에게 ‘선생님을 죽이겠다’는 말까지 퍼트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 아이의 고통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네 번째 아이는 생긴 것도 단정하고 말투도 예의 바르고 무엇보다 인사를 잘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생일날 선물로 친구들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했다가 난리가 났습니다. 폭력 사건으로 경찰서에 다녀오는가 하면, 친구에 대해서 나쁜 소문을 자꾸 퍼뜨렸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 앞에 오면 온순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아이의 위선이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다섯 번째 아이는 욕설을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제게도 말끝마다 쌍시옷을 남발하던 그 아이.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대화를 할수록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적응을 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하찮은 이유로 가혹한 구타를 했고, 어머니와 함께 맞은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서점  가서 책도 사서 나누고 떡볶이도 먹으면서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돼서 매년 제가 운영하던 공부방에 찾아왔고 전화로 안부를 전해줍니다. 그의 아버지는 많이 뉘우쳤고 지금은 전혀 때리지 않고 언어폭력도 거의 없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저를 지나쳤던 수많은 상처 받은 아이 중에서 유일하게 힘을 쓸 수 있었던 아이입니다. 아이들이 느끼는 고통은 바다보다 깊습니다. 

《싯다르타》에게 배운 두 가지 

스스로를 ‘시인이요 탐색자이자 고백자’라고 불렀던 헤르만 헤세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불안에 사로잡히고 혼란스런 정신의 소유자인 10대 소년 싱클레어의 성장기를 다룬 작품 《데미안》에는 당시 유행하던 낭만적인 분위기 대신 새롭게 도입한 정신분석 심리학의 사상을 반영했습니다. 도덕적이고 사랑으로 가득 찬 밝은 세계와 타락과 죄악, 유혹으로 가득한 어두운 뒷골목 같은 음침한 세계가 충돌하는 ‘마음’의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게 소설의 주제였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야말로 진정한 현실이며, 우리가 피하려고 하고 불결하게 생각했던 ‘악’의 주제를 〈성경〉에서부터 끌어들여 재평가했습니다. 동생을 죽인 악의 화신 ‘카인’을 재해석하고 선악이라는 이중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는 세계를 상징하는 새로운 신 아프락사스(압락사스)를 세웠기에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종교사상서’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도 유년기와 청소년기, 사춘기, 청·장년기, 노년기가 있듯 국가도 인류도 생애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발표할 당시 인류의 생애시간은 ‘사춘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한 사람의 생애로 놓는다면 어느 시점일까요? 불행하게도 아직 사춘기에도 가지 않은 유년기가 아닐까 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청소년들과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는 건 어렵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제주도 청소년들과 ‘데미안 함께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데미안》을 쓰고 나서 헤르만 헤세는 1년 반 동안 창작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정신분석 치료를 한참 받고 난 후 1922년에 다시 쓴 작품이 종교적 성장소설이라고 부르는 《싯다르타》입니다. 그러니까 《싯다르타》는 《데미안》 두 번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복한 바라문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싯다르타는 외모의 아름다움과 해박한 지식 등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엄친아, 팔방미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기쁨을 주지 못한 채 내면의 불만이 점점 커지는 불안정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유복한 가정이라는 점은 《데미안》과 닮았지만 아름다움과 해박한 지식과 용기와 결단력 등은 싯다르타가 더 우월합니다. 결국 우월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존재의 회의감은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더 강하게 풍겨 나옵니다. 자신의 그림자 같은 죽마고우 고빈다의 지혜도, 아름다운 기생 카밀라에게 받은 진한 사랑과 세속적인 쾌락도 싯다르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침잠이란 것이 무엇인가?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며, 그것은 자아 상태의 고통으로부터 잠시 동안 빠져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키는 것이야. 이러한 도망, 이러한 잠시 동안의 마비는 소몰이꾼도 여인숙에서 쌀 막걸리 몇 사발이나 잘 발효한 야자유를 마시고 취하면 겪는 일이네. 그런 사람도 취하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며, 인생의 고통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며, 결국 잠시 마비 상태를 겪게 되네. 그 사람은, 쌀 막걸리 사발 위에 곯아떨어진 상태로, 싯다르타와 고빈다가 기나긴 수행 과정을 거친 후에야 자신들의 육신으로부터 빠져나올 경우 도달하게 되는 경지, 그러니까 비아의 상태에 잠시 머무르는 경지와 똑같은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이야기야.” - 《싯다르타》에서
지식인과 종교지도자의 고행이라는 게 노숙자가 소주 한 병 마시고 곯아떨어지며 인생의 시름을 잠시 마비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싯다르타의 주장은 매우 파격적이면서도 통쾌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교양 넘치는 말투와 문체로 부드럽게 읽히는 글을 쓰거나 화려한 언변을 자랑해도 그것은 결국 돼지 목의 귀걸이밖에 되지 않으니, 우리 어른들은 거대한 ‘위선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아니 ‘위선 왕국’의 노예로서 충실히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이 청소년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니 부끄럽습니다. 

문명을 완성했다고 자부했던 서양인의 믿음이 연이은 세계대전과 대공황, 파시즘 등 파국으로 끝나 버렸을까요?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던 내 아이가 어쩌다가 갑자기 문제아, 비행청소년이 되어 버렸을까요? 싯다르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것은 이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아래의 마디에서 다음 마디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요? 우리들은 대나무의 몇 번째 마디에서 맴돌고 있나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래’일 것입니다. 어쩌면 첫 번째 마디인지도 모르죠. 

저는 싯다르타가 다음 마디로 가기 위해서 보여준 모습 중에서 두 가지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는 ‘고통의 공감’입니다. 고통 받는 타인이 되어보는 것이죠. 작품 속 싯다르타가 왜가리와 재칼의 시체가 되어본 경험은 제게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나무 숲 위를 날아가는 왜가리가 겪는 배고픔과 죽음을 겪었죠. 모래 해변 위에 쓰러진 재칼의 시체 속으로 들어간 싯다르타의 영혼은 몸이 부풀고 썩는 느낌, 하이에나들한테 갈가리 찢기고 콘도르들에게 뜯겨 껍질이 벗겨지는 모습, 뼈다귀만 남았다가 먼지가 되어 들판으로 흩날려 버리는 느낌을 생생하게 겪습니다. 만약 내가 상대방의 고통은 더 가까이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달라질 것입니다. 

두 번째 모습은 ‘듣는 것’입니다. 《싯다르타》에는 뱃사공 바주데바가 나옵니다. 그는 듣는 자입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싯다르타는 바주데바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가 하는 말을 고요하게, 마음을 툭 터놓고, 느긋하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바주데바가 자기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법이 없이, 자기가 말하는 중에는 칭찬의 말도 꾸중의 말도 하지 않고서, 다만 가만히 귀기울여 듣고만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이런 식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다 자신의 인생, 자신의 구도 행위,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꼈다. 
- 《싯다르타》에서 
바주데바는 강에게서 듣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음(知音),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는 말처럼 동양에서는 ‘듣는 일’을 무척 중시하였던 전통이 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그 아이에게 두 가지 방법을 어렴풋이 썼던 게 기억납니다. 그 아이의 고통을 공감하려고 노력했고, 그 아이의 말을 최선을 다해서 듣고 반응을 주었던 것이 쌓여서 좋은 영향을 주었던 거 아닐까요?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에 부처님의 이야기와 청소년들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느끼고 듣는 ‘고통의 고향’입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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