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물’은 다른 지역 그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뿌리내려 숨 쉬는 모든 생명이 한라산과 곶자왈을 거쳐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 환경파괴로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 제주 물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는 요즘, 남아있거나 사라진 439개 용출수를 5년 간 찾아다니며 정리한 기록이 있다. 고병련 제주국제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저서 《섬의 산물》이다. 여기서 '산물'은 샘, 즉 용천수를 말한다. <제주의소리>가 매주 두 차례 《섬의 산물》에 실린 제주 용출수의 기원과 현황, 의미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제주섬의 산물] (35) 법환동 막숙물 용출수군

옛 이름이 ‘법환잇개’라 했던 법환동. 이곳은 고려 공민왕 때 ‘목호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숙영했던 격전장이었다. 목호(牧胡)는 말을 기르던 몽골인 목자(하치)를 말한다.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서 파견된 최영 장군은 목호들을 토벌하고 추격하였는데, 목호 잔당들은 법환리 앞바다에 있는 범섬으로 후퇴하여 웅거하고 마지막까지 항거했다. 최영 장군은 전함을 모아 섬을 포위하고 밧줄로 병사들을 상륙시켜 10여일 만에 목호의 난을 평정했다. 이때 최영장군이 숙영했던 막숙에서 사용했던 용천수가 법환동 포구 해안가에 있다. 

이 산물은 법환동 주민의 생명수로 군대가 군막을 치고 숙영하면서 사용한 물이라고 하여 막숙물이라 부른다. 원래 이름은 동쪽에서 솟는다고 해서 동가름물이었다. 최영 장군이 묵호를 물리친 후 막숙물이라 부르게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산물이다. 일찍부터 외적의 침입에 시달렸던 제주에는 항몽시절 수천의 삼별초 군사들이 마셨던 애월읍 상귀리 장수물·구시물처럼 주민 생명수 역할을 하면서도 군사 목적에 이용된 산물들이 있다. 또한 성안에는 외적이 침입에 맞서 몇 달 몇 년씩 버텨야 할 때 식량에 못지않게 마실 물이 풍부한 용출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처럼 목호들을 추격하던 최영 장군이 법환포구 근처에 수천 명의 군사로 진을 친 후 범섬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주둔지인 법환포구에 많은 양의 용출되는 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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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숙물 산물군.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법환포구에는 경계를 같이 하는 막숙물이 군락을 형성하여 세 군데서 솟아나고 있다. 이 물은 해안에서 나는 산물이면서,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종의 곱가른(구분한다는 뜻의 제주어)물이다. 동쪽은 동가름물(막숙물, 남성전용), 서쪽은 서가름물(여성전용)이라 하였다. 물을 동서로 구분지은 것은 살고 있는 집의 위치에 따라 가까운 곳의 물을 떠서 사용했기 때문에, 물의 명칭을 달리하여 부른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 산물들은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빨래를 하거나 음식물을 씻는 여성전용의 물이다. 그리고 동쪽 가장 끝에 있는 물은 엉(언덕)에서 솟는다고 해서 엉물이다. 산물 입구에는 소화2년(1927년)에 음료수로 수선한 것을 기념하는 비문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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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숙물(동가름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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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가름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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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물(앞)과 막숙물(뒤).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막숙물 건너편 포구 동쪽 언덕 밑에서도 산물이 솟는다. 이 산물은 남성전용의 물로 사장앞물(엉덕물. 엉물)이라 한다. 이 산물은 언덕 밑 궤에서 솟는데, 묵호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최영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이 활쏘기 등 훈련을 하였던 곳에 있는 물이라 해서 사장앞물로 부른다. 또한 물이 나오는 곳이 제주어로 ‘엉’이라는 언덕이고, 이 언덕 궤(굴 같이 움푹 페인 곳)에서 물이 용출된다고 하여 엉덕물 또는 엉물이라고도 한다.

몇 해 전 태풍(볼라벤)이 지나가면서 사장앞물의 지붕이 날아가고 콘크리트 둘러싼 막숙물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으나 마을사람들에 의해 태풍 전 모습을 최대한 살려 2013년에 복구했다. 이때 사장앞물은 복구 시 그늘 막을 다시 설치하지 않아 산물이 더 살아난 느낌이다. 이 물은 원래 여성전용 목욕 터였지만 지금은 남성전용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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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앞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묵호의 난과 관련하여 막숙물에서 서쪽 바닷가인 범섬 앞에 베염주리물(배연주리, 뱀주리, 배염줄리)이 있다. 이 물은 최영장군의 승전과 연관이 있다. 베염주리란 바다로 길게 뻗은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의미한다. 최영 장군이 범섬에 남아 있던 몽고족을 섬멸하기 위해 범섬까지 배들을 줄지어 맨 모양이 마치 긴 통나무가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하여 유래했다. 이 물은 비상용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염분기가 많아 식수로 사용하기 보다는 주로 빨래하는 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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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염주리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싸움과 관련된 산물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두머니물이다. 강정동과 법환동 경계선을 이루는 해안가인 두머니깍에 있다. 이 물은 밀물 시에는 바닷물에 잠기는데, 예로부터 애기어멍(아기 엄마)들이 젖이 나오지 않을 때 이 물을 마시면 젖이 잘 나온다고 하여 어머니들이 이곳에 와서 물을 먹고 목욕을 했다는 용출수다. 또한 이 산물이 있는 곳은 강정과 법환마을의 경계선이기 때문에 바다 해산물로 인해 두 마을이 자칫 잘못하면 싸움이 발생할 수가 있었으므로, 일단 두머니물에 가면 싸움을 멈추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진다. 두머니는 ‘두면이’가 변한 것으로 ‘머리두(頭), ’낮면(面)‘, ’화할이(聏)‘의 뜻으로 법환과 강정마을 대표들이 이 산물에서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화합을 다짐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물이 있는 두머니물깍은 전망이 좋아 확 트인 바다와 범섬을 조망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여기에 산물을 설명하는 안내판은 있지만 산물로 내려가는 길이 없어 찾기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바다 서측 파이프가 연결된 곳을 따라 가면 파이프 끝 지점에 돌과 일부 시멘트로 막아 물을 보관한 부채꼴 모양의 자그마한 물통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 베염주리물 입구에 산물터를 재현하듯 인공해수풀장을 만들었다. 마을의 역사와 애환을 담은 베염주리물이나 두머니물 등 일부 산물이 방치되어 있는 현실이 애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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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머니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 고병련(高柄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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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에서 태어나 제주제일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과에서 수자원환경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공학부 토목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제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사단법인 동려 이사장, 제주도교육위원회 위원(부의장)을 역임했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고연(노인요양시설 연화원) 이사장을 맡고있다. 또한 환경부 중앙환경보전위원과 행정자치부 재해분석조사위원, 제주도 도시계획심의, 통합영향평가심의, 교통영향평가심의, 건축심의, 지하수심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건설기술심의와 사전재해심의 위원이다.

제주 섬의 생명수인 물을 보전하고 지키기 위해 비영리시민단체인 ‘제주생명의물지키기운동본부’ 결성과 함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제주 용천수 보호를 위한 연구와 조사 뿐만 아니라, 시민 교육을 통해 지킴이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섬의 생명수, 제주산물> 등의 저서와  <해수침입으로 인한 해안지하수의 염분화 특성> 등 100여편의 학술연구물(논문, 학술발표, 보고서)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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