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22) 《시지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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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나를 시험에 빠지게 한 ‘중2모녀’

‘인도는 수천 년의 시간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누군가 말했죠. 인도만 그렇겠습니까? 인간 자체가 수천 년의 세월이 새겨놓은 오늘입니다. 요즘 저는 매일 수십 년의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중3녀’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줘야 하고, 중1녀석들의 우울증과 외로움을 체크합니다. 목요일 오전에는 저와 처지가 비슷한 엄마들을 만나 문학 수다를 떨면서 숨을 좀 쉽니다. 하지만 점심이 소화되기가 무섭게 그날 오후에는 지역아동센터 천사들 앞에서 영혼이 탈탈 털립니다. 동문시장 입구에서 양말 파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목청껏 외치지만 아이들은 양말 살 생각이 없는 행인처럼 딴전을 피웁니다. 일요일에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중2남’들을 구슬려 글을 쓰게 만들고 무려 논어책을 읽게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오후가 되면 고등학교 남학생과 ‘시 쓰기’를 합니다. 고등학교 남학생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전액을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특히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교실에서는 ‘충격과 공포’처럼 진로교육과 세뇌교육 프로그램이 집중된다고 합니다. 어느 ‘고1남’은 “이 정도까지 해야 할까?”싶은 생각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수업 대신 ‘프로그램’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개는 수업 안 받아서 좋다는 반응들이었지만 제가 만난 학생은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시 쓰기’라는 절망 하나를 혹처럼 붙여줬다니, ‘내가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 공포영화에 한 획을 그은 〈여고괴담〉의 캐릭터 ‘진주’는 진실한 친구가 그리워 학교를 계속 다니죠. 그리고 옛날에 자신을 괴롭혔던 ‘늙은 여우’ 박 선생과 사랑하는 친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성추행하는 ‘미친 개’ 오 선생을 차례로 응징합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저는 이상하게도 이 영화의 인물과 닮았다는 생각을 자꾸 합니다. 학창 시절 저는 ‘학교 공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철딱서니가 없고 게을러서 공부를 안 했다’고 한마디 하면 그만이었을 테지만, 제 인생에다 대고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왜 공부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철저히 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지식은 논리적이지 않았고 저의 물음표는 눈처럼 불어만 갔고 공부를 할 이유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학교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친구들은 저를 괴롭히고 무시하고 눈칫밥만 늘었습니다. 정말 지독하게 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철이 든다는 것, 요령을 터득한다는 것, 어른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살’이었습니다. 내면에서 꿈틀대는 부정할 수 없는 그 생명의 몸짓을 스스로 짓이겨놓는 ‘정신적 자살’에 대한 대가로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정신적 자살을 강요했고, 그 많은 생명력 넘치던 아이들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정신적인 집단자살과 집단거세의 광기어린 시간을 지나쳐 부모가 된 아이들은 자신의 자녀에게도 그 길로 가라며 내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모의 요구를 거절하고 부모와 전쟁을 치르는 아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한 10년쯤 되었을 것입니다. ‘중2모녀’의 전쟁 같은 생활을 가까이 들여다본 것이. 

10년 전 그 엄마는 ‘맨발로 집을 뛰쳐나가 달려오는 트럭에 몸을 던지고 싶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표현이 몸서리칠 정도로 강렬해선지 저는 ‘참전’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 따님에게 문자메시지까지 보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따님은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습니다. 전혀 반응하지 않은 것이죠. ‘중2모녀’가 어떤 성격이라는 건 제대로 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처럼 중2모녀의 이야기가 10년만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딸이 안타까운 엄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계획을 보따리처럼 풀어보지만 딸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딸의 삶이 어떨 것이란 것은 안 봐도 드라마. 엄마는 드라마의 끝을 다시 써보려고 했습니다. 딸은 엄마에게 막장드라마든 신파극이든 자신의 드라마니까 엄마는 관여하지 말라고 거부했습니다. 드라마의 스토리를 놓고 엄마와 중2딸은 내전(內戰)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습니다. 10년 만에 다시금 소환된 중2모녀의 전쟁 한가운데에서 저는 10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저도 나름 지혜로워졌고 전투력도 조금 생겼기 때문입니다. 

10대들의 수호자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요구한 ‘반항’

《시지프 신화》는 지난 번 글로 함께 읽었던 《이인》과 쌍둥이 작품입니다. 글쓴이 알베르 카뮈는 두 작품을 동시에 탈고하고 출판사로 넘겼죠. 편집자와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두 작품이 우열이 분분했습니다.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의 친화 관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의미심장하오. 에세이가 그 책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소. 특히 소설에서 일견 단색적이고 거의 빈약해 보이던 것을 어떤 확고한 무엇으로 바꾸어 놓고 있소. 그 확고함은 긍정적인 것이 되고 원초적인 어떤 힘을 갖게 되오.” 
- 앙드레 말로

“나는 《이방인》을 단숨에 다 읽었다. 매우 아름답다.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훌륭하다.. 에세이? 《시지프 신화》는 그만 못하다. 지적이지만 그건 형이상학적 사건들의 총명한 연대기에 불과하다.” 
- 장 폴랑 (갈라마르 출판사 편집위원) 
‘시지프 설화’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인 시지프가 신들의 비밀을 누설해 인간을 도와준 죄로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설화에 따르면 시지프의 직업은 강도였다고 합니다. 신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비밀을 훔쳐갔다는 것은 강도질이나 다름없고 웬만한 지혜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두 개의 이미지는 사실 같은 의미입니다. 시지프는 거대한 바위를 산의 정상까지 힘겹게 끌고 올라가지만 바위가 정상에 닿는 순간 또 다시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고 이런 일이 영원히 반복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벌, 천형(天刑)이죠. 카뮈는 ‘시지프 설화’를 20세기의 시대정신으로 재해석한 에세이를 쏟아냈습니다. 쏟아냈다기보다는 ‘벼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살을 강요하는 시대에 맞설 무기가 필요했으니까요.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쓴 것은 1936년.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돼 밥벌이를 하기 위해 자질구레한 일에 매달렸고 정치적인 활동도 실망하고 결혼도 실패합니다. 인생의 희망이라곤 구멍만큼도 보이지 않아 ‘자살’ 충동까지 일어납니다. 카뮈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보다는 자살에 대해서 작가적인 상상력과 정신으로 달려듭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의,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음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우선 대답해야 한다. 
- 《시지프 신화》 도입
예술가들이 어떤 부분에 주목하는지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시지프 신화》는 병과 고통, 부조리 같은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한의학에서 병은 우리 몸과 공존하며 우리 몸에 들어온 손님입니다. 몸의 균형이 깨졌을 때 빈틈으로 병이 찾아오기에, 병이 난 시점으로부터 나의 일상생활을 세세히 돌아보라는 게 병에 대한 동양적 상상력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병이 났을 때 자신의 주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잘못한 점을 사과하고 또한 자신이 평소 어떤 잘못을 했는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고 합니다. 

반면 서양적인 상상력은 제거입니다. 외과 치료처럼, 감기약에 자주 들어가는 항생제처럼 ‘병’은 적이며 제거의 대상이죠. 현대 한국인들은 동양의 몸을 가졌으면서 서양의 상상력에 익숙합니다. ‘부조리’라는 병에 대해서도 제거하려고만 드는 어른들의 습관을 보십시오. 카뮈는 기성 세대의 조건반사 같은 행태를 ‘회피’라고 규정했습니다. 

인간은 부조리를 통합하고 그 합체에 의하여 대립, 분열, 절연(이혼)이라는 부조리의 근본적인 성격을 없애버린다. 이러한 비약은 일종의 회피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인문주의자들이 종교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가 이런 부조리들을 ‘악’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 국가의 유산이 남아 있는 우리의 주류적 사고에서 보면 모든 악은 제거해야 마땅합니다. 10대의 부조리한 모습과 번민은 ‘철없음’이라고 흔히 치부되지만, 그것은 ‘악’의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어른의 시각에서 보면 10대적인 것은 ‘악’입니다. 10대는 악마의 아들딸이며, 시급하게 신의 축복으로 귀의시켜야 하는 대상들입니다. 이 지점에서 10대의 정신적 자살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10대의 자살률 증가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통계청은 ‘2015년 사망원인 통계’에서 한국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밝혔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 10대 자살률은 꾸준히 그리고 부쩍 늘고 있습니다. 

카뮈는 10대를 지지합니다. ‘10대여, 반항하라! 부모와 기성 세대에게 맞서라.’ 싱클레어가 꿈에서 칼로 아버지를 찔러 죽이려 했듯이 어른스러운 것들과 맞서고 반항하라고 역설합니다.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중략)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동경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그 반항은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일 뿐이다. 
- 알베르 카뮈, 같은 책
자살은 불합리한 사회 모순에 대한 체념이거나 동의에 불과합니다. 육체적인 자살이든 정신적인 자살이든 같은 자살입니다. 항간에 ‘영혼이 없다’거나 ‘좀비’의 은유가 자주 거론되는 까닭은 정신적 자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말을 요약하면 10대가 부조리한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성장에 필수적이기까지 하며,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서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10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부모의 뜻에 10대가 동의하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으며, 거꾸로 부모가 10대의 뜻에 동의하고 지지하고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카뮈는 10대를 위한 작가입니다. 

카뮈의 실존주의는 부조리의 실존주의라고도 합니다. 1·2차 세계대전 등 전 지구가 성장통을 앓았던 20세기의 이야기는 10대와 무척 닮았습니다. 10대는 한 인간의 사춘기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알베르 카뮈의 20세기는 인류의 사춘기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중2모녀’의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냐고요? 어느 조용한 저녁, 모녀는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이 들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 말들을 애써 다스렸습니다. 말이 나오는 대신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엄마의 눈물을 보고 딸은 깜짝 놀랐습니다. 무성한 말의 잡초가 시야를 가리지 않으니 비로소 엄마의 진심이 보였던 것이죠. 모녀는 식사를 마치고 걸었습니다. 엄마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딸의 감춰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교에서의 생활과 친구들과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확실. 그리고 왜 공부를 할 수 없었는지. 

‘알베르 카뮈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흐뭇하게 아빠 미소를 짓고 있겠구나’하는 상상이 미치자 저도 얼굴에 미소가 졌습니다. 카뮈가 인용한 니체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동감”입니다. 우리가 경청하고 예의를 다해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떤 시점이 아니라 지금 너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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