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73) 집게도 집은 있다
 
* 게드레기 : 바다에 사는 고둥류의 집게
* 싯나 : 있다

사람의 경우를 보자. 별장 같은 남의 집을 맡아 보살피는 관리인은 있어도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바다에 사는 집게란 놈은 이름 그대로 남의 집에 들어가 제 집처럼 살아가는 묘한 녀석이다. 웬만한 재간이 아니다.

바닷가에 기어 다니는 집게도 살아갈 집은 갖고 있다 함이다. 그게 설령 고둥이 살다 버린 껍데기일망정, 또 칠칠치 못하게 등에 짊어지고 다닐지언정 그것을 자기 집으로 만들어 살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사람임에랴. 

“아이고, 뭐니 뭐니 해도 이녁 고망이 제일이여”(아이고,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사는 구멍, 곧 내 집이 최고다)라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게드레기도 집은 싯나’라 함은 집 없는 사람을 은글슬쩍 나무랄 때 쓰는 말이다.

집게는 살아가는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생태계에서 그리 흔치 않은 종의 하나다. 고둥 껍데기를 등에 짊어지고 다닌다. 그것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포식자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자신의 신체구조를 이용한다. 크지도 않은 몸 어디에 그런 꾀가 숨어 있을까. 참 슬기롭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이를테면 바다거북은 견고한 등딱지 속에 몸을 숨기고, 바다가재 같은 갑각류나 조개 무리는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아주 딴딴한 껍질을 씌우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기능적으로 변형하거나 적절히 이용하는 데 반해 집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딱딱한 고둥 껍데기를 활용한다. 남이 살다 죽으면서 버려진 집, 폐가(廢家)인 셈이다.

해수면 아래 얕은 바닥, 한 무리의 고둥 사이로 뒤뚱뒤뚱 움직이는 고둥이 보인다. 조심스럽게 잡아 올려 보면 빈 껍질 속에 집게란 놈이 들어 앉아 있다. 갑작스레 위험을 느낀 녀석,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톡 불거진 두 눈과 몸을 고둥 껍질 속에 쏙 집어넣고는 오른쪽 큰 집게발로 입구를 막는다. 삽시간이다. 동작이 매우 잽싸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란 말이 실감이 날 지경이다.

녀석은 제 몸채 만한 고둥 껍데기를 등에 짊어지고 다니다가 몸집이 커지면 살던 집을 버리고 다른 집을 찾아간다. 새 집을 찾아 이사하는 생존방식이 유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집게는 평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방랑객이다. 이를 빗대 슬픈 이야기로 의인화하기도 한다.

실은 부드러운 살이 노출돼 공격의 대상이 되므로 말랑말랑한 배와 꼬리가 포식자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기 십상이다. 고둥 껍데기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이고 견고한 최후의 장치다.

집게는 자신이 들어갈 집에 이만저만 집착하지 않는다. 제 몸에 맞아야 하고 낡아 너덜거리는 걸 집으로 삼아 들어앉을 순 없지 않은가. 집을 고르기에 여간 민감하지 않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기가 막히게도 이런 집게의 생리를 꿰찬 속담이 있다. 우리 선인들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찰안(觀察眼)이 번득이는 대목이다.

‘구젱기 똥 누레 가 불민 게드레기가 초지헌다.’ 
(소라 똥 누러 가 버리면 집게가 차지한다.) 
소라가 큰일을 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뜬 사이를 놓칠세라 집게가 껍데기에 들어가 차지해 버리는 탈취 행위를 익살맞게 표현하고 있다. 유머가 만발한 속담이 아닌가. 이를 단순하게 볼 게 아닌 것 같다. 인간사회의 각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라 할 만하다. 기회만 있으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존경쟁의 치열함을 우회적으로 비유할 법하다. 또 집 한 채의 절실함, 주거생활의 심각성을 떠올리게도 한다.

허점만 생기면 주도권을 뺏는 세상사의 한 단면을 그럴싸하게 그대로 묘사했다. 실상 그대로가 아닌가.

또 썩 이치에 닿는 비유가 있다.

‘구젱기 양제 가 분 딱살엔 게드레기가 들어앚나.’
(소라 양자 가 버린 껍질에는 집게가 들어앉는다.)
소라가 양자 가 버린다 함은 몸통이 껍질에서 빠져 나갔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의인화해서 남의 집에 양자로 가 버렸다 한 것이다. 참 해학적 표현이다. 생존경쟁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만 있지 않은 모양이다. 소라가 껍데기를 비우는 그 순간, 촌각을 다퉈 집게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하고 있으니. 잇속을 챙기는 데 여간 당차고 약삭빠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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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드레기도 집은 싯나. 6.13 지방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자유한국당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TK(대구, 경북)에서만 승리했다. 제주 속담 '게드레기도 집은 싯나'(집게도 집은 있다)에 비춰보면, 이제는 집 한 채(TK) 밖에 남지 않은 듯 하다. [편집자] 출처=포털사이트 다음.

‘게드레기도 집은 싯나(집게도 제가 살 집은 있다)’ 함이 맞다.

의식주 중에도 집처럼 소중한 게 없다. 제 한 몸 의지하고 비바람을 막아 줄 작은 주거공간인, 한 채의 집만은 있어야 한다. 남의 집일지언정 제 집처럼 몸을 놓을 수 있는 공간. 최소한 집게가 짊어진 그 집 만한.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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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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