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그 느낌을 산문으로 쓴다.’ 제주시인 현택훈의 새 칼럼 <영화적 인간>은 스포일러 없는 영화 리뷰를 추구한다. 분석적 영화 리뷰를 읽으면, 영화를 보고 싶었던 마음도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영화에 대해 시시콜콜 다 말하는 글 대신, 영화의 분위기만을 느낄 수 있게 쓰는 것이 기준이다. 영화에 대한 정보보다는 그 영화의 아우라로 쓰는 글인 셈이다. 당연히 영화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글도 있다. ‘욕심이라면,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그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좋겠다.’ 시인의 당부다. [편집자 주]
 
[영화적 인간] (1) 버닝(BURNING), 2018, 이창동

1525066849772.jpg
▲ 영화 <버닝>(BURNING, 2018, 이창동)의 한 장면.

제대하고 택배 상하차 일을 한 적 있다. 한 1년 6개월 정도였나. 저녁 8시에 출근해서 밤새 택배 상자들을 분류하고 새벽 5시에 퇴근했다. 군에서 야간 근무를 자주 했기에 밤을 새야 하는 부담은 크지 않았다. 휴전선에서 군복무를 했는데, 이틀에 한 번은 경계초소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는 했지만 비슷한 사이클로 살았다. 다른 점이라면 군에서는 멍하니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 되지만 택배 물류창고에서는 멍하니 있다가는 택배상자에 손이 깔릴 수 있다.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들을 택배로 보내기 때문에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다가오는 물건들은 마치 다가올 시간들처럼 난감했다. 쌀, 자전거,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생물, 파라솔, 의자, 블라인드 등이 밀려왔다. 이십대였다. 시인을 꿈꿨지만 시를 쓰지는 않았다. 시도 쓰지 않으면서 막연히 동경했다. 도서관에서 시집을 빌려 읽다가 반납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시집이 있으면 몇 달간 읽었다. 그러면 연체자가 되어 몇 달간 시집을 빌리지 못했다. 악순환이었다.

새벽 3시 경에 야식을 먹었다. 한 손에 하얀 접시를 든 채 줄을 선 청년들은 모두 새벽의 표정으로 서 있었다. 좀비처럼 어기적거리며 식판을 들고 식탁 앞에 앉는다. 통성명은 하지만 일당치기라서 서로 깊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친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영영 나오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가지 않아 그를 잊어버린다. 작업 현황판에도 알바들은 이름이 아닌 숫자로 표시되어 있다. 

내가 한 일은 일명 까대기라 불렀다. 막노동 중에서도 잡부가 하는 일이다. 트럭에서 물건을 내리면 각 지역별로 분류한다. 그리고 다시 각 지역을 맡은 트럭에 상자들을 싣는다. 깨진 유리창을 테이프로 붙인 사무실에는 경리가 있었다. 단발머리에 선하게 생겼지만 험한 사내들을 상대해서인지 제법 강단이 있었다. 소장의 조카라는 말이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컴퓨터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보얗게 빛났다. 얼굴에도 광택이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겨울에는 물류창고 밖 한쪽 구석 드럼통에 불을 지폈다. 그렇게 청춘을 불태웠다. 담배를 피우며 고작 나누는 얘기는 페이에 대한 얘기나 게임 얘기였다. 가끔 취업이나 복학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래 붙어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공무원 시험 준비하다 온 사람도 있고,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온 사람도 있고,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나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은 쉬는 날에 혼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었다. 단발머리 경리가 팝콘을 든 채 서 있었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건가, 말을 붙이려 다가가다 걸음을 멈췄다. 그녀 옆으로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류창고 소장이었다. 영화 티켓을 들고 서 있는 소장은 평소와 다르게 젊어 보였다. 나이가 많아 보여 깍듯이 대했는데 말이다. 그날 극장에서 두 사람을 본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자꾸 생각났지만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경리가 바뀌었다. 새로 온 경리도 단발머리였지만 얼굴에서 광택이 나지는 않았다. 

낮에 눈을 붙여야 밤에 일을 하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그녀를 생각했다. 쉬는 시간에 그녀가 내게 박카스를 내밀며 제주도 사람은 처음 본다며 말한 적 있다. 제주도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며 웃던 그녀. 그녀가 웃어주면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현택훈 
고등학생 때 비디오를 빌려보며 결석을 자주 했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처음 쓴 소설 제목이 ‘중경삼림의 밤’이었다. 조조나 심야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영화를 소재로 한 시를 몇 편 썼으나 영화 보는 것보다 흥미롭지 않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 좀비 영화에 빠져 지내다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