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그 느낌을 산문으로 쓴다.’ 시인 현택훈의 글 <영화적 인간>은 스포일러 없는 영화 리뷰를 추구한다. 영화 리뷰를 읽으면 영화를 보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은 점이 그는 안타까웠다. 영화에 대해 시시콜콜 다 말하는 글 대신 영화의 분위기만으로 제2의 창작을 하는 글을 쓰겠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에 대한 정보보다는 그 영화의 아우라로 쓰는 글이다. 당연히 영화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글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글 중 가장 좋은 글은 그 글을 읽고 그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글이다.’ 이 코너의 지향점이 여기에 있다. [편집자 주]

[영화적 인간] ② 마녀(The Witch : Part 1. The Subversion), 2018, 박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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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녀>(The Witch : Part 1. The Subversion, 2018, 박훈정)의 한 장면.

지금은 사라진 비디오 대여점. 내가 살던 동네에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이름은 화신 비디오. 내가 이용한 마지막 비디오 가게였다. 넷플릭스가 나에게 맞는 영화를 일러주듯 그때 비디오 가게에서는 가게 주인이 그 역할을 맡았다. 평소 내가 빌리던 영화의 색깔들을 알고 있는 가게 주인은 내게 몇 작품을 추천하곤 했다. 그리고 그의 추천작은 대개 만족스러웠다. 

쿠엔틴 타란티노. 그도 비디오 대여점 직원이었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그가 권하는 영화가 되는 셈이다. 나는 타란티노가 권하는 영화에 길들여졌다. 길들어진다는 건 망각을 강요받는다기보다 그 망각을 이용한 순응에 가깝다. 소는 얌전히 사료를 먹는다. 길들여진다는 건 사회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을 없애는 일이다. 

“이 영화 볼래?”

화신 비디오의 주인은 FBI 요원 같은 비밀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내밀었다. 붉은색 바탕에 영어로 인쇄된 글씨가 강렬했다. <내츄럴 본 킬러>. 올리버 스톤의 영화였다. 내가 <JFK>, <도어즈>를 여러 번 빌렸던 것을 알고 있는 주인은 내게 <내츄럴 본 킬러>를 보며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영화는 극단으로 치닫기만 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거북해서 아름다웠다. 

소 가격은 곤두박질치더라도 방화 소식 다음으로 기사화된다. 우리는 소처럼 얌전히 길들여진다. 길들여지면서 등급이 매겨진다. 클래스가 다른 사람하고는 어울리지 못한다. 함부로 넘보다가는 머리에 쥐난다. 우리는 등급에 따라 인생을 산다. 그것을 엄마는 누누이 말해왔다.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어야 숨통이 트인다. 세상은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내길 원한다. 분류되어야만 유전이 편리하기 때문일까. 

마치 주사를 주입하듯 <킬 빌>, <폭력의 역사>,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악마를 보았다>, <황해> 등을 보며 연명했다. 이제 비디오 가게는 사라졌지만 영화 산업은 계속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숙련된 요리사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 홋카이도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의 눈알은 크고 흰자위가 깨끗하다. 사람들은 가장 맛있는 부위만 골라 물고기를 빌려간다. 문제는 그 물고기가 반납되었을 때 생선뼈밖에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비디오 대여점과 극장과 VOD의 VIP 고객으로 살았다. 우리가 기웃거린 생선가게는 근사하고 화려했다. 워너 브라더스 로고가 박힌 생선상자는 신뢰감을 준다. 그 신뢰는 우리가 길들어진 결과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 척 해야 견딜 수 있다. 그러다 영영 잊어버린다. 정말 고맙게도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채 진화했다. 

현택훈 
고등학생 때 비디오를 빌려보며 결석을 자주 했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처음 쓴 소설 제목이 ‘중경삼림의 밤’이었다. 조조나 심야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영화를 소재로 한 시를 몇 편 썼으나 영화 보는 것보다 흥미롭지 않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 좀비 영화에 빠져 지내다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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