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77) 닭도 제 알만씩 그러내 먹는다

* 지 : 제, 자기 
* 앞씩 : 알만씩, 알만큼
* 근어먹나 : 끊어먹는다, 그러내어 먹는다

닭은 가금류로 옛날에는 마당에나 우영밭(텃밭)에 방사(放飼)했다. 여러 마리를 풀어 놓는다. 한데 이것들이 먹잇감을 찾아 먹는 것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까이 몸 맞대고 사는 것들이라 서로 다툴 법한데 그런 일이 없다. 앞가림 하느라 제 앞에 있는 검불더미만 헤쳐 가며 먹이를 찾아먹는다. 좀체 남 앞엣것에 덤벼들어 독차지하려 들지 않는다. 내 몫과 남의 몫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한낱 미물인데도 과욕을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짐승인 닭의 세계에도 저들끼리 지키는 공동체의식 같은 게 있는 것은 작은 놀라움이었다.

‘닭도 지 앞씩 근어먹나’는 과욕 혹은 탐욕을 경계하는 말이다.

옛날이라고 예외겠는가. 사람에게 있게 마련인 게 탐욕이다. 궁핍에 쪼들리다 보면 더욱 기를 쓰고 탐욕에 빠지게 되는 게 사람이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 더 많이 가지려고 우격다짐하며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한심했으면 ‘닭도 지 앞씩 근어먹나’ 했을 것인가. 못 살이 눈이 벌겋던,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보다 오죽했으면 그런 눈앞의 것에 지나치게 탐하는 인간들에게서 닭을 떠올렸을까. 놀라운 연상이다. 이치에 닿는 비유요 비교다. 풍자적이기까지 하면서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경계의 의미도 녹아 있다. 행간을 읽을 일이다.

탐욕은 한마디로 죄악의 근본이다. 고통의 씨가 되며 사행심(射倖心)을 조장해 순리를 버리고 역리로 흘러 탐하는 바를 얻으려 하다 마침내 패가망신에 이르고 만다. 퇴직금을 싸들고 경마장에 가 몽땅 털리고 길바닥에 나앉은 사람 얘기를 한두 번 듣는가. 사람이 탐욕을 좇다 보면 그 지경에 이르는 건 시간문제다.

탐욕의 근원은 생존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한다. 먹을 것을 갖고 있어야 하고, 하루 먹을 치가 있다면 일단 하루를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날 먹을 것도 있어야 그날을 생존할 수 있다. 더 가지려 하는 이유는 바로 생존에 대한 위기감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생존의 위기의식에서 벗어나고, 생존의 위기에 대한 스트레스나 정신적 고통을 탈피하려고 하는 행위가 곧 탐욕이다.

다만, 탐욕이 자신의 범주를 벗어날 때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에게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위로까지 번지기 일쑤다. 그래선 안된다. 소위 합리적 이기주의란 자신이 돈 버는 데 열심인 것은 좋은데 남을, 내가 돈 버는 것에 끌어들였으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마땅하다

탐욕은 삼독(三毒) 혹은 삼구(三垢)의 하나다. ‘毒(독)’은 독소란 뜻이고, ‘구(垢)’는 띠끌이요 몸에 까맣게 절은 때다. 물건을 애착해 탐내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 함이다. 색욕, 재물욕이 다 그러한 것이다.

인간에게 욕구는 무한하지만 실제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한 욕구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질주하게 되면, 온갖 불의와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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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도 지 앞씩 근어먹나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12일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명백한 회계 기준을 중대하게 위반했고 그 위반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고의로 공시를 누락한 것으로 판단했다"며 검찰 고발 조치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공시 누락이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곧 '이재용 승계'를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무한히 제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다. [편집자] 출처=sbs뉴스 유튜브 영상 갈무리.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려 들지 말고 다른 사람도 함께 이익 되게 하는, 공생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공동의 이익 속에 자신의 몫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극단적 이기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은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은 큰 서원(誓願)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全一)하면, 작은 욕심은 저절로 잘길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된다(『대종경』 수행품 36)”라 일렀다. 

탐욕심을 공익심으로 바꾸라는 말씀이다.

자기의 이익만 내세우는 이기주의, 무한히 제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다.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닭도 제 앞만큼씩 그러먹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임에랴. 옛 어른들은 그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올곧고 맑게 살려는 마음자리, 그게 곧 철학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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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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