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03) 세일라 벤하이브 저, 이상훈 역, 《타자의 권리-외국인, 거류민, 그리고 시민》, 철학과현실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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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일라 벤하이브 저, 이상훈 역, 《타자의 권리-외국인, 거류민, 그리고 시민》, 철학과현실사, 2008. 출처=알라딘 홈페이지.

무사증 제도로 말레이시아를 통해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 난민들이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이전에도 한국을 찾은 난민들은 있었고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가입국인 한국이 이들을 받아들이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수용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의 소지가 없었다. 난민 심사규정이 까다롭고 수용국의 심사기준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난민심사 기준이 유난히 엄격하고 보수적이라는 점은 지적되었지만 ‘난민문제’ 그 자체가 사회적 논란의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난민이 갑작스레 논란의 중심이 된 것은 500여명의 난민 숫자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비가시적이었던, 즉 ‘있지만 보이지 않았던’ 문제를 가시적인 문제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 현재 난민은 지구촌 최대의 현안중 하나다. 그리고 한국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동안 ‘비가시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우리사회는 난민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제도적 장치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난민신청자에게 요구되는 사항과 자격이 무엇인지 난민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비되지 못했으며, 그들의 관련 정보에 대한 알권리도 보장되지 못했다. 관료들이 임의적으로 조작할 수 없게 명문화된 절차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예멘 난민은 우리들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반성의 계기일 수 있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앞세웠지만 여전히 편협한 민족주의적 감정에 붙들려 있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한 채 시장이라는 정글에서의 이기적 경쟁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외부적 충격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사태에 접근할 수도 있다. 하나의 공동체적 질서에 이방인이 들어오는 것은 불안감을 초래한다.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유난히 인종주의적이거나 자문화중심주의어서가 아니다. 갑작스러운 ‘타자’의 방문은 ‘침입’으로 느껴질 수 있고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예멘 난민을 통해 드러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인종주의적 혐오로 몰아붙이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보편적 인권과 도덕적 의무에 호소한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적 습속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문화 보존이 자기 보존의 합법적 기초 가운데 하나인가?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자국 영토에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망명객을 거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 어느 정도까지의 복지 하락이 박해나 가난, 억압을 피해 온 사람들의 입국을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명분으로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가?”
- 《타자의 권리-외국인, 거류민, 그리고 시민》 61쪽
오히려 지적되어야 할 것은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절차와 제도를 만들지 못하고 난민을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인종주의적 태도로 대해 왔던 정부의 방관이었다. 이방인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을 인종주의적 혐오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앞에서 말했지만 인종주의라고 매도될 수는 없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논의의 장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이 문제라는 것이다.      

난민 문제가 ‘있지만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비가시적’이었다는 것은 난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질문조차 던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피해진, 그리고 지속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타자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일회적인 사건으로만 간주하거나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서 다룸으로써 이미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던 타자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자 세일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가 《타자의 권리-외국인, 거류민, 그리고 시민》에서 제기하는 핵심은 타자를 통한 우리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다. ‘우리’가 겪게 되는(겪을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과의 접촉을 통해 기실 ‘우리’ 또한 생각만큼 동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방향은 언제나 파국적이었다. 즉 ‘우리’ 안에 이질성을 부정하기 위해 외부의 타자(적)를 구성할 때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벤하비브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국민이라는 자기입법(자기구성-인용자)이 마치 동질적 시민의 단선적 행위인 양 이해되면”(같은 책, 205쪽) 제한된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는 민주적 권리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멘 난민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그동안 암묵적인 동질성의 신화 속에 감추어져 왔던 이질성과의 직면이다. 이러한 직면은 중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외부의 적을 통해 내부적 동질성을 강화하는 퇴행의 길에 들어설지 아니면 그들의 수용을 통해 우리들 안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보다 깊은 인권과 다양성의 길로 전진할지의 선택의 순간에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잠시 동안 벤하비브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그녀 주장의 출발점은 보편적 인권 개념과 민주주의 개념 사이의 긴장이다. “한편으로는 맥락과 공동체를 초월해 타당한 인권 영역과,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문화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존하는 사법적-시민적 공동체의 특수성 사이에 조성되는 긴장을 피할 수 없다.”(같은 책, 164쪽) 이러한 긴장은 정치적 공동체 안에 속할 권리와 보편적인 도덕적 의무 사이에 충돌을 불러 온다. 우리가 처한 곤란은 보편적 인권은 유명무실해지고 사법적-시민적 공동체의 특수성이 극단적으로 부각되면서 나타나는 혼란이다. 

벤하비브가 지적한 것처럼 “근대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을 주권자로 만듦과 동시에 이런 국민주권의 정당성을 기본적 인권원칙의 고수에서 찾는 면에서 스스로를 한계 짓는 집합체이다. ‘우리, 국민’이라는 말은 바로 그 말 자체 속에 보편적 인권에 대한 존중과 국가적으로 경계 지어진 주권적 요청이라는 입헌적 모순을 담고 있는 내재적으로 위험한 문구다.”(같은 책, 208쪽) 그런데 ‘우리, 국민’을 넘어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벤하비브가 제안하는 길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모순을 열린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그 경계를 갱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타자의 출현은 특수한 공동체의 한계로만 나타나는 민주주의를 위협하지 않으며 오히려 “타자의 권리는 민주주의적 기획을 더욱 포괄적이고 역동적이며 또한 숙고된 형태로 성숙시킨다”고 말이다. (같은 책, 119쪽) 

이미 우리 모두가 역사를 통해 알게 된 것처럼 민주적 질서 그 자체는 결코 고정되거나 완성될 수 없다. 심지어 퇴행할 수도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퇴행을 원하지 않는다면 현재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민주적 질서는 외부적 충격에 직면해서 동질성을 주장하는 순간,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현재의 질서를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 위협받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항상 퇴행하거나 전진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 만약 우리가 전진을 원한다면 “다수 대중과 문화적 정체성을 달리하는 개인들”을 환영해야 한다. 타자는 “우리의 제도와 문화적 전통을 재전유하고 재해석하게 해주는 해석학적 동반자 역할을”(같은 책, 199쪽)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은 관대하게 유보해 두었던 우리들의 인종주의적 혐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예멘난민들을 향해 표출되었던 우리 사회의 ‘혐오’에 대한 평가를 잠시 유보한 이유는 그것에 앞서 제도적 차원의 문제를 짚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혐오’의 사회적 맥락을 생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을 인종주의와 혐오로 몰아붙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가 예멘 난민을 향해 쏟아졌던 인종주의적 혐오를 묵인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 타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스스로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 즉 글자그대로의 난민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오인(misrecognition)은 ‘비난’받기 보다는 ‘비판’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한편에 근거 없는 혐오가, 다른 한편에는 그런 혐오에 대한 비난만 있다면 비판과 교정의 계기는 사라진다. 벤하비브는 이러한 비판과 교정의 계기를 담론적 절차라고 이름 붙인다. 

한 국가에 속한 구성원이 그 국가의 구성원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양자가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거부의 이유가 타고난 특성이나 속성,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 종족, 성, 종교, 인종, 언어, 성차 등이라면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타자를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체류기간이나 언어소통능력, 일정 정도의 시민 교양, 물질적 자원의 입장. 시장성 있는 기술 소지 등”(같은 책, 169-170쪽)은 실제로 남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규범을 어기지는 않기 때문에 제기 가능한 질문이다.

벤하비브가 주장하는 담론적 절차를 통한 타자와의 대면 즉 스스로를 반추해 볼 수 있는 비판의 과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들의 난민을 향한 태도는 그런 절차와 비판을 처음부터 봉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예멘 난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간주했다. 그들의 종교를 문제 삼았으며 성별을 근거로 잠재적인 성범죄자로 몰아갔다.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그들 모두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러한 혐오 감정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스스로의 안전, 우리 아이들의 안전을 내세웠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이 없는데도 그렇게 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런 근거 없는 혐오감정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가로막는다고 맞받아쳤다. 

여러 가지 문제가 착종되어 있었다. 첫째,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위험의 문제가 있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며, 누군가 나를 이유 없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짓누르고 있다. 이런 일상의 위험은 예멘 난민과 무관하게 우리 사회가 만들고 키워온 것이다. 유대와 연대를 내팽개친 채 승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무한 경쟁 과정에서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면화하는 교육으로 우리들 모두의 마음을 황폐화한 것이 누구인가? 일베와 워마드, 묻지마 살인은 우리가 만든 지옥도의 일부가 아닌가? 갑작스럽게 출현한 이질적 타자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투영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둘째, 한국사회가 민주적 토론을 통한 비판과 반비판, 그리고 합의 형성과정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생각과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외부적’ 타자에게 모욕을 주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내부적’ 타자로 공격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모순은 스스로가 체험하고 있는 가상의 공포, 그 공포로부터 오는 적대적 감정에 압도되어 자각되지 못한다.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그래서 합리적 토론을 견뎌내지 못할 억측을 주장으로 강변할 때 민주주의는 송두리째 뿌리 뽑힌다. 

셋째, 일상에서의 민주적 토론문화뿐만 아니라 제도적 절차 또한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난민을 받아들인 제주도뿐만 아니라 중앙정부도 우왕좌왕했다. 소위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도 침묵하거나 근거 없는 혐오에 동조했다. 이러한 요인 또한 합리적인 토론을 가로막아 버렸다. 

넷째, 소수일지라도 사람들 마음속에 실제로 인종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종종 사람들은 유럽과 북미의 백인에게는 가지지 않는 경멸의 시선을 비서구인에게 보낸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을 모두 죄인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태도를 사회학 교과서는 ‘광신’이라고 부른다. 문제의 심각성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태도가 인종주의 또는 종교적 광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언제나 인종주의자와 종교적 광신도로 낙인찍을 또 다른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사이비 교단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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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관심사는 예멘 난민을 통해 드러난 우리사회의 문제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퇴행하게 하는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운 우리들의 마음 상태다. 위쪽 사진은 지난 8월 2일 난민 수용을 반대하며 가진 제주난민대책도민연대의 기자회견 모습. 아래 사진은 7월 12일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이주인권노동단체의 기자회견. [편집자] 출처=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오마이뉴스.

마지막으로, 이러한 요소들이 착종되면서 나타난 결과는 보편적 인권과 도덕적 의무에 대한 성찰과 국민국가 안의 민주적 권리라는 갈등적 측면이 서로 대면하고 충돌하고, 그럼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계기 자체가 봉쇄된 것이었다. 조금 이기적으로 말해보자. 예멘 난민은 우리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예멘 난민을 통해 드러난 우리사회의 문제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퇴행하게 하는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운 우리들의 마음 상태다. 그리고 그런 마음 상태를 조장하고는 점잖게 타이르면서 빼앗기고 억눌린 자들 사이의 이전투구를 즐기는 집단의 존재다. 민주주의가 ‘그들’과 ‘우리’의 경계를 나누는 실천이라면 지금 현재의 우리는 연대의 대상들 사이에서 악무한의 다툼을 벌이면서 ‘그들’로 인식되어야 할 지배적 질서와 체계, 지배계급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혐오는 우리를 갉아 먹을 것이다. 연대를 파괴할 것이다. 하지만 그 혐오는 누군가를 미소 짓게 할 것이다.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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