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물’은 다른 지역 그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뿌리내려 숨 쉬는 모든 생명이 한라산과 곶자왈을 거쳐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 환경파괴로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 제주 물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는 요즘, 남아있거나 사라진 439개 용출수를 5년 간 찾아다니며 정리한 기록이 있다. 고병련 제주국제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저서 《섬의 산물》이다. 여기서 '산물'은 샘, 즉 용천수를 말한다. <제주의소리>가 매주 두 차례 《섬의 산물》에 실린 제주 용출수의 기원과 현황, 의미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제주섬의 산물] (74) 화순리 번내 산물

화순리는 예전부터 안덕계곡 물줄기를 따라 창고천 하류에 형성된 마을이다. 산방촌이라 하다가 논이 있어 ‘벼를 많이 수확’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번내(樊川, 벗내, 볏내의 변형)와 ‘물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 합쳐졌다. 그래서 화순리는 일명 ‘샘골’이라 하며 주민들의 생명수 역할을 했던 큰물, 퍼물, 함백이물, 엉물, 세양물, 하강물, 녹남물, 곤물 등 산물들이 족히 열 군데가 넘었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화순리 웃동네인 골물동(곤물동)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길로 약간 들어가면 길 옆 바위 밑에서 솟아나 물이 깨끗하다하여 식수로 사용한 곤물이 있다. 이 산물은 마을 한 가운데로 산물이 흐른다고 해서 '고을물(골동물)'로 부르다가 곤물로 명칭이 바뀌었다. 동네가 형성되기 전 이 일대가 천연림(곶자왈)으로 그 가운데서 샘이 솟았기 때문에 곶자왈에서 발원한다하여 ‘곶물’이라 했던 산물이다. 이 물로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하여 곶물동네(동수[洞水]동)라 했는데, 지금 곤물은 시멘트 구조물로 변형되어 있지만 형태는 옛 형태가 남아있다. 첫째 칸은 식수, 둘째 칸은 음식물 씻는 곳, 셋째 칸은 빨래나 목욕하는 곳인 3칸으로 나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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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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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물 물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설촌의 기원을 갖고 있는 함백이물도 있다. 이 산물은 바가지의 일종인 ‘함박’으로 떠다 먹을 정도로 수량이 매우 적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하류 쪽에 작은 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산물은 3칸으로 나누어 사용했던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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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백이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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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백이물 물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함백이물 건너편 동쪽에는 큰물이 있다. 큰물은 솟는 양이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식수와 관개배수로 사용한 물이며 아래쪽에 논이 있었다. 이 물 역시 3칸 구조인데, 이제는 용출되는 암반만 놔두고 완전히 개조해 버려 곁에 있는 나무만 산물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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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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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물 물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큰물에서 260m 떨어진 화순중로7번길 건너편(동쪽) 화순해안로에 진입하면 월라봉 입구에 퍼물이 있다. 퍼물은 펄물인 니수(泥水)의 의미로 이 지역은 개천으로 바닥에 진흙으로 형성된 펄이 습지를 형성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개간된 습지논인 ‘퍼물논’의 관개배수용 물로 사용하였다. 이 산물도 3칸 구조로 물통만 놔두고 개수되었다. 퍼물은 이 일대에 논을 만든 수로개척자인 김광종과 인연이 깊은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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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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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물 물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엉은터’를 중심으로 해수욕장까지 많은 산물들이 산재해 있는데, 엉은턱물은 바닷고기가 은신했던 곳이라 하여 ‘어은동’이라 부르는 서허동 동네의 물이다. 이 산물은 입구에 비석이 서 있는데 마모되었는지 글자가 없으며 일부 개수되었다. 그래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3개의 물터로 구분하여 담을 쌓았다. 첫 터는 3칸의 식수와 음식물 씻는 용이며, 연결된 두 번째 터는 빨래와 목욕용이다. 나머지 세 번째 터는 물팡으로 있는 것으로 볼 때 식수용으로 사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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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은턱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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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은턱물 첫 터(식수+음식물 씻기).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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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은턱물 두 번째 터(빨래+목욕).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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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은턱물 세 번째 터(식수).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녹남물(녹낭물, 돗물, 저수, 새물)은 서동네(서상동) 사람들의 귀한 식수로, 입구에 치수공덕비(1956년)가 세워져 있는 점을 볼 때 이때 새로 축조했다고 해서 새물이라고도 한다. 녹남물은 해수욕장 서쪽 입구에 있는 산물로, 주위에 방축을 쌓지 않아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농어가 잡혔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편으로 산물 주변에 녹나무가 무성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돗물(돗은 돼지의 제주어)이라고도 한 것은 한라산 서쪽으로 산록과 임수를 연결하는 서림수를 타고 내려온 끝 지점에서 용출되고 있어, 엄동설한에 멧돼지들이 따뜻한 곳에 있는 이 산물을 먹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산물은 일자형 한 칸으로 최근(2015년)에 비가림 시설로 완전히 재개수하여 지금은 빨래터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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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개수된 녹남물(2015년).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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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물이 된 녹남물(1956년).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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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남물 물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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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남물에서 빨래하는 모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녹남물 바로 위에 경계를 같이 하는 작지물이 있다. 작지물이란 해안가에 많이 있는 작지 틈에서 물이 솟아났다는데서 불러진 이름으로, 바닥은 시멘트화 되었지만 징검다리식으로 돌로 두 칸으로 나눈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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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지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샘골인 화순리 마을을 대표하는 물은 예전부터 하강물(下强水)이다. 이 산물은 바위틈에서 두 줄기 물로 용출하여 엉덕물, 개물 등과 합류하면서 물 힘이 매우 강해져 아래로 물이 내린다고 하여 하강물이라 한다. 지금 하강물은 자그마한 돌하르방이 지키는 산물로 남녀목욕탕과 담수욕장의 물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 하강물의 원류는 해수욕장 서쪽 남·여 담수욕장의 앞 돌하르방이 있는 도로가 사각물통 안에서 용출한다. 마을의 속설에 의하면 산물이 동쪽을 향해 흐르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서쪽을 향해 흐르면 흉년이 든다고 전해오고 있는 물로 마을 끝자락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대적하며 마을을 지킨 수호신 같은 물이었다. 금이 함유된 백사장 모래와 만나 한 때 이 물을 이용하여 사금채취를 했다. 금과 관련하여 화순해수욕장을 화순금모래해변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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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강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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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강물 남녀목욕탕.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하강물에서 해수욕장 쪽의 언덕에 엉물이라는 엉덕물도 있다. 언덕을 제주어로 ‘엉’이라 하며 이 산물은 식수통과 빨래터로 개수되어 있다. 그리고 엉덕물과 하강물이 합쳐 해수욕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산물을 이용하여 족욕도 할 수 있는 쉼터를 만들어 피서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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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덕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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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모래해변 쉼터.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엉덕물 바로 밑 해수욕장 서쪽 끝자락에 있는 태역밧(잔디밭의 제주어) 근처 해안 백사장의 모래 암반 지대 여기저기서 산물이 자연적으로 용출된다. 이 물을 통틀어 테우리물이라고 하며, 이중 가장 특색 있는 물은 사이폰 현상에 의해 암반 위에서 용출되는 물인데, 우마용 물이다. ‘테우리’는 ‘목동’의 제주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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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우리물 암반 위 용출 모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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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암반지대 산물 용출 모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하강물 동쪽에 세양물 혹은 상약수(上若[弱]水)란 산물이 있는데, 물이 솟는 방향에 의해 서향물이라고도 한다. 이 산물은 하강물에 비해 수세가 약하고 위쪽에 있다고 하여 ‘상약수’라 부르는 물이다. 이 산물은 하강수와 합하여 흐르거나 하강수와 흐름의 방향을 놓고 서로 다투면 나라에 큰 변이 생긴다는 구전이 전해지는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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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양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마을에는 물이나 농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이는 쌀농사를 가능토록 안덕계곡의 물을 끌어 오는 대규모 토목공사 벌여 화순을 옥답으로 만든 김광종 선생의 지혜와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일(첫째) 강정, 이(둘째) 도원, 삼(셋째) 번내’라고 할 정도로 제주에서 쌀농사가 가능했던 비옥한 토지를 가질 수 있는 마을이 될 수 있었다. 

이 관개수로 공사로 16만㎡(약 5만평)의 볼모지가 논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논이 있던 자리에 발전소가 들어서는 등 마을의 발전되면서 논농사는 사라졌으며 답(天水畓) 형태의 밭만 한때 논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다행히도 화순리의 산물(함백이물과 퍼물)에 세워진 표석에서 ‘화순리 설촌의 근원이며 역사이기에 유적으로 가치를 영원히 기리고자 이 비를 건립하는바’라고 하고 있듯 화순리는 산물 보존의 모범을 되는 마을이다. 삶의 유적으로서 또한 논농사의 가치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산물의 역사를 지키는 의지가 좋은 귀감이 된다.

# 고병련(高柄鍊)

제주시에서 태어나 제주제일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과에서 수자원환경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공학부 토목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제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사단법인 동려 이사장, 제주도교육위원회 위원(부의장)을 역임했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고연(노인요양시설 연화원) 이사장을 맡고있다. 또한 환경부 중앙환경보전위원과 행정자치부 재해분석조사위원, 제주도 도시계획심의, 통합영향평가심의, 교통영향평가심의, 건축심의, 지하수심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건설기술심의와 사전재해심의 위원이다.

제주 섬의 생명수인 물을 보전하고 지키기 위해 비영리시민단체인 ‘제주생명의물지키기운동본부’ 결성과 함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제주 용천수 보호를 위한 연구와 조사 뿐만 아니라, 시민 교육을 통해 지킴이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섬의 생명수, 제주산물> 등의 저서와  <해수침입으로 인한 해안지하수의 염분화 특성> 등 100여편의 학술연구물(논문, 학술발표, 보고서)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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