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03) 왕운에 집 짓는다

* 왕운 : 왕성하게 되는 운(운세), 旺運

사람이 살면서 제 집 짓는 일처럼 중요한 것도 없다. 우선 터가 있어야 하고, 집을 지어 올릴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예전 시골 살림에 이런저런 사정이 되지 않아 남의 집에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집을 지으려면 터를 갖고 있다 해서 그곳에다 바로 집을 짓고 앉지 않았다. 집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가족이 함께 사는 공동의 보금자리이므로 아무 때, 아무 곳에나 짓는 게 아니란 생각을 했던 것. 옛날 비록 돌 쌓고 흙질해 초가를 올리면서도 반드시 알아보는 게 있었다.
  
풍수설에 의해 터를 보고 방위를 보고 날을 잡아 집 짓는 일을 시작했다. 공들여 가며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아무 때, 아무 데나 함부로 집을 지으면 동티가 나 화(禍)를 부른다 해서 여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니 가족 가운데서도 집안의 대주(大主)인 가장의 운세를 보아 길운일 때 좋은 터를 잡아서 지어야 가운이 트인다고 여겼다.
  
그 좋다고 보는 운세가 왕운(旺運)이다. 왕성하게 되는 운기를 뜻한다. 요즘 같은 합리적‧과학적인 사고로 무장한 시대에도 이를 일축해 버리지 않고 더러 수용하기도 한다. 미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간다는 얘기다. 가족의 평안과 행운을 위한 일인데 무시해 지나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풍수설(風水說)은 우리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던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풍수설이란 땅의 모양새나 방위에 따라 인간의 생활에 좋고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하는 이론이다.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들어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널리 퍼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과 결합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에 커다난 영향을 주었다. 집을 짓거나 묏자리를 고를 때면 으레 이 풍수지리의 원칙에 알맞은 곳인가를 따졌다. 명당지지(明堂之地)를 찾아서 집을 짓거나 무덤을 쓰면 그곳 주인뿐 아니라 후손들이 잘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중심이 되는 주산(主山), 명당을 지키는 백호(白虎), 명당 앞쪽으로 흐르는 명당수, 집이나 궁궐의 명당(明堂), 명당을 지키듯 감싼 산 청룡(靑龍)이 풍수의 핵심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자문위원(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이 문 대통령의 ‘광화문 대통령’ 공약 보류를 발표하면서, 우선적으로 ‘대통령 관저’를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풍수상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관저가 갖고 있는 사용상의 불편한 점,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감안할 때, 장기적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직속위원회 관계자가 청와대에서 공개적으로 풍수설을 제기한 것은 퍽 이례적인 일이다.

비과학적 풍수설에 터해 광화문 대통령 공약을 내건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자체가 결코 지나친 시각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풍수가들은 청와대 터가 바위가 많은 북악산의 살기(殺氣)를 받는 곳이라 주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소외된 후궁들의 거처가 있었던 곳으로 한(恨)이 서려 있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청와대 터가 풍수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터가 아니라 죽은 영혼의 거처란 주장도 있긴 하나, 모두 비과학적인 한낱 설에 불과한 것 아닐까.

미신을 앞세워 막대한 국가예산을 쏟아야 가능한 대통령 관저 이전을 얘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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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운에 집 짓나.
일련의 대통령을 둘러싼 우여곡절을 풍수에 연유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쪽으로 목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은 국민과 나라만을 보고 주어진 소임을 다하면 재직 중은 말할 것 없고 퇴임 후에도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게 순리다. [편집자] 출처=청와대 홈페이지.

풍수설에 자연과학적 암시가 깔려 있다는 점을 수용하더라도 이는 주거환경에 관한 사항일 뿐이다. 이를테면 ‘배산임수’는 여름엔 집 앞 물가의 시원함이 집 안을 시원하게 해 주고, 겨울엔 집 뒷산이 삭풍을 막아 온기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 그래서 예전엔 배산임수를 주거지 최적의 입지로 쳤었다.

시대가 변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선인들의 삶의 지혜로 유용한 면이 없지 않으나, 산이니 물이니 하는 게 길흉화복을 예견하는 수단이 될 가치는 없다.

청와대를 풍수 쪽으로 보자면 미묘하긴 하다. 

이승만 대통령이 과욕을 부리다 쫓겨났고, 박정희 대통령은 영부인을 비명에 죽게 하고, 본인도 비명에 사망했다. 그 후, 전두환 대통령도 감옥생활을 하고, 노태우 대통령도 감옥까지 가 모양새가 구겨졌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은 김영삼‧김대중 두 대통령마저 아들들이 감옥에 가고, 아무튼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명예롭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 또한 임기를 마치는 게 수월치 않았지 않은가. 이명박 대통령도 재임 중 쥐박이란 말까지 들어가며 이상한 대통령으로 대접 받다 임기를 마쳤으나, 형이 감옥 생활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현직에서 탄핵돼 지금 감옥에 있다.

대통령예우법에 따라 대우를 제대로 받는 분은 오직 이명박 전 대통령뿐이니, 실로 청와대가 겁나는 집 아닌가.

하지만 이런 일련의 대통령을 둘러싼 우여곡절을 풍수에 연유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쪽으로 목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은 국민과 나라만을 보고 주어진 소임을 다하면 재직 중은 말할 것 없고 퇴임 후에도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게 순리다.

‘왕운에 집 짓나.’

집 짓는 데 좋은 시기와 명당 터를 찾는 일이 예전 같진 않지만, 지금도 철학관을 찾거나 지관을 앞세우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 오랜 풍습 쯤으로 치부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하긴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을 따르면 속 편하니 마음 가는 대로 할 일이긴 하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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