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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연극 '잃어버린 마을' 초연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리뷰] 제주4.3 연극 <잃어버린 마을>

‘복잡, 미묘.’

22일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첫 선을 보인 연극 <잃어버린 마을>을 보고 난 뒤 두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주4.3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지금까지 4.3 예술과는 다른 여러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외적으로는 아이돌 가수의 출연이 가장 눈에 띈다. 인기 그룹 ‘빅스(VIXX)’의 멤버 혁(한상혁)과 ‘SS501’의 김규종을 캐스팅했는데, 이들은 첫 연극 도전임에도 비중 있는 역할(재구)을 맡았다. 제작진이나 배우들 구성도 서울 연극계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대다수다. 제주 출신은 작가 겸 연출자 김봉건, 조연배우 양승한 둘 뿐이다.

<잃어버린 마을>은 창작극이다. 2013년 연극 <순이삼촌>을 연출한 김봉건 씨가 극본, 연출뿐만 아니라 제작에도 참여하며 주도적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주제는 4.3 가운데서도 역사의 화마에 사라진 마을 ‘곤을동’이다. 곤을동 출신으로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유일하게 고향을 지키는 주인공 동혁(배우 양창완)이 곤을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현대사와 엮어 들려준다.

극 중에서는 4.3 뿐만 아니라 1979~80년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까지 함께 다룬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1979년이다. 동혁의 아들 ‘재구’는 가상의 국내 최고 명문대 한국대학교에서 최연소 교수로 임용된다. 하지만 학생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고문 당하고 직위 해제되는 등 수난을 겪는다. 김영삼 신민당 의원 제명, 서울역 회군 등 관련한 실제 사건들이 대사로 등장한다.

특히나 중요한 특징은 주인공 동혁의 신분이다. 그는 제주도민이면서 4.3 당시 서북청년회(서청)에 협조한 인물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신념적인 활동이 아닌 본인 가족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정으로 그려진다. 

서청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대표작은 1997년 놀이패 한라산의 <서청별곡>이 있다. 말로는 전부 담을 수 없는 서청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그들도 역사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일부 포함한 작품이다. 

당시 <서청별곡>을 연출한 김수열 시인은 “그때도 마찬가지로 4.3을 예술로 표현할 때는 피해자 입장에서 다루곤 했다. 그러다가 커다란 덩어리로만 인지해온 서청이란 존재가 개개인들은 어떠한 모습인지 궁금해졌다”면서 “당시 조사를 해보니 다양한 면면들이 있었다. 제주를 떠날 때 한라산 방향으로 큰 절 하며 눈물로 사죄하는 사람도 있었고, 제주에 정착해서 잘 사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았다. <잃어버린 마을> 주인공처럼 생존을 위해 서청에 협력한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다”고 밝혔다.

1989년 놀이패 한라산의 <사월굿 한라산>으로 사실상 역사를 써내려간 4.3 연극은 크게 볼 때 군인, 경찰에게 희생된 4.3의 주된 피해자들의 시선에서 풀어가는 방식을 취했다. 역사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고발하는 방식에 더해 노동운동, 해녀, 강정마을 등 다른 소재를 함께 묶기도 했다. 대부분의 4.3 연극에서 서청은 실제 역사에 부합하는 극악무도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잃어버린 마을>에서도 군인, 경찰, 서청은 무자비한 가해자로 표현된다. 

주인공 동혁은 서청에 협조해 홀로 살아남았다는 자책감과 아내·아이를 끝내 지키지 못했다는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산다. 뒤늦게 이런 과거를 알게 된 아들 재구는, 아버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음에도 아비를 ‘죄인’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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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잃어버린 마을'의 주인공 동혁. 제공=김봉건.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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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당한 주민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 제공=김봉건. ⓒ제주의소리

자랑스러운 아들 재구는 직장을 잃고 몸과 마음을 다쳐 신음하고,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가족사마저 한꺼번에 터지면서 동혁 가족은 풍파를 겪는다. 하지만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위로와 함께 갈등은 빠르게 봉합되는데, 이런 엔딩은 관객이 보기에 다소 섣부른 전개로 다가온다. 

<잃어버린 가족>은 다른 시공간의 순간을 동시에 등장시키는 대비 연출을 적극 사용한다. 청년 동혁(배우 신동혁)이 4.3 학살이 본격화되는 국면에서 마을 사람들을 찾고자 소리치며 무대 바깥쪽을 뛰고, 동시에 중년 동혁이 무대 안쪽에서 트라우마에 몸부림치는 식이다.

엔딩 장면에서도 임신한 아내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청년 동혁과 중년의 동혁 가족이 무대 양 끝에 각각 배치된다. 한 쪽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 고통 받는데, 다른 한 쪽은 가족 구성원 간에 서로를 보듬으며 아픔을 치유한다. “저 하늘의 별을 보라”는 상투적인 대사까지 등장한다. 동시에 다른 배우들까지 함께 등장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순간, 마치 청년 동혁의 고통은 사소하게 쪼그라드는 것으로 비춰진다. 관객 입장에서 쉽사리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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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을 살리기 위해 서북청년회에 협조한 청년 동혁(왼쪽)이 끝내 임신한 아내를 떠나보내고 오열하는 모습. 제공=김봉건.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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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이 고향이면서 제주에 남아있는 성범(왼쪽)과 그를 가족처럼 대하는 동혁. 제공=김봉건. ⓒ제주의소리

더욱이 보통 4.3 피해자들의 입에서 들었던 “살다보면 살아진다”를 서청 협조자 가족들이 사용하는 모습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물론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말은 4.3 때 너븐숭이에서 가족을 떠나보낸 동혁의 현재 아내(둘째 아내)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극의 흐름이 아내 보다는 남편인 동혁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자칫, 서청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향으로 읽힐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주인공 동혁은 4.3 때 주변에서는 단독 선거 반대, 남로당 가입 같은 이야기를 해도 “내 가족 챙기기에도 바쁘다”며 거리를 두는 성실하지만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한 평범한 인물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서청의 하수인을 선택하지만, 결국 가족도 지키지 못한다. 너븐숭이 학살터에서 지금의 아내를 구했음에도 서청과 한 편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현실에 굴복한 나약하고 비겁한 개인을 4.3과 연계한 시도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악행에 별다른 비판 없이 침묵하거나 무관심하는 태도는 사실상 동조하고 돕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동혁의 끝은 처절한 비극이어야 취지가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을까.

이런 해석에 대해 김봉건 작가 겸 연출자는 “동혁은 본인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어도 가해자 편에 서서 도왔다는 점에서,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인물이다. 애초 동혁의 원죄로 인해 가족 구성원이 뿔뿔이 흩어지는 내용이었으나, 첫 무대는 다른 의도로 읽혀질 우려가 있어 보인다”고 엔딩 장면을 수정할 뜻을 내비쳤다.

4.3을 취재하러 제주에 온 다른 지역 기자들이 조심스럽게 "43년 생이신가요?", "6.25가 4월 3일에 일어났지요?" 식으로 질문하며 긴장 속에 웃음을 주는 방식은 신선하다. 대신, 4.3에 대해 묻는 기자 질문을 주민이 그저 외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좌제 등으로 계속 고통 받아온 살아남은 이들의 어려움까지 나아가 언급됐으면 하는 아쉬움을 준다. 

동혁의 선배였던 무장대 대장과 군경의 복장이 큰 차이가 없어 착오를 일으키는 점, 작품 속 총기의 현실 고증, 소총 대신 죽창이 드는 게 덜 어색할 여성 무장대원 등은 작품 몰입을 위해 더 다듬을 필요가 있겠다는 사족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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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잃어버린 마을'의 한 장면. 제공=김봉건. ⓒ제주의소리

마지막 장면에 주목했지만, <잃어버린 마을>은 전체적으로 볼 때 '재미있는' 연극이다. 공연 시간이 2시간에 가깝지만 크게 지루하지 않았고, 출연진 역시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짜임새 있는 연기와 호흡을 선사한다. 아이돌 가수 혁은 전문 배우에 비하면 역량의 차이가 존재하나, 중요한 순간에서는 열과 성을 다해 연기에 몰입하면서 극에 녹아든다.

김봉건 연출은 지난해 <순이삼촌> 현기영 선생이 전국문학인대회 심포지엄에서 던진 메시지에 ‘용기’를 얻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현기영 선생은 “이제는 정통 리얼리즘만 고집할 게 아니라, 환상, 코미디도 아우를 수 있고, 모더니즘의 방법론도 차용하는 새로운 리얼리즘도 찾아내야 하겠다”면서 “예컨대 ‘양심적인 서청’을 주인공 삼을 수 있고, 그 사건에 희생된 순경의 아내와 이른바 ‘산폭도’의 아내가 쌍나란히 앉아 김매는 모습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고 후배 작가들에게 당부했다.

김봉건 연출은 제주 출신으로 서울에서 연극영화를 공부하고, 현재 IT업에 종사하면서 연극 제작도 겸하고 있다. 장일홍 극작가의 4.3 작품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발표한 이색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서청 협조자 주인공, 아이돌 가수 캐스팅 등 이전까지 4.3연극에서 볼 수 없던 시도는 1988년생이란 비교적 젊은 나이와 제주 밖에서의 이런 경험으로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4.3에 대한 원작자의 인식 보다 4.3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다름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작품 평가와는 달리 ‘4.3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잃어버린 마을>의 시도는 분명 유의미하다.

2월 22일부터 4월 7일까지 진행되는 공연 일정에서 전체 70%가 넘는 표가 예매가 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팔렸다. 빅스, SS501의 팬들이 응원하는 마음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22일 첫 공연의 관객은 99%가 젊은 여성들이었다. 막이 내리고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관객들 사이에서 ‘4.3’이란 단어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공연 시작과 함께 예매 사이트나 SNS에도 <잃어버린 마을>을 통해 아픈 역사를 알게됐다는 반응이 올라오고 있다.

그동안 제주 안에서 만들어온 4.3연극과 사뭇 다른 과정, 내용으로 다가오는 <잃어버린 마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진화? 변이? 판단은 관객의 몫이지만 4.3특별법, 4.3진상조사보고서 등 공인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새로운 시도들은 4.3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계속 필요하다고 본다.

<잃어버린 마을>은 4월 12~13일 제주 한라아트홀에서도 공연한다. <서울=한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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