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스페인에서 저체중 모델을 퇴치한 까닭

지난 9월 20일 로이터(Reuters)에 너무 마른 모델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합의한 이스라엘 패션계의 기사가 실렸다.

이스라엘 광고 물량의 60%를 점하는 회사들은 체질량지수(BMI, 체중을 신장의 제곱으로 나눈 수치로 18.5 이하를 저체중으로 분류) 18미만인 모델을 광고에 쓰지 않겠다고 합의했다.

▲ 한 모델이 21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파사렐라 시벨레스 패션 쇼에서 안토니오 알바라도의 봄-여름 디자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저체중 모델에게는 이 규정을 충족할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이스라엘 패션 산업 전체에 최저 체질량 지수를 시행할 법안이 국회에서 1차 독회를 거쳤으며 연말에 인준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슷하게, 같은 달 18~22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파사렐라 시벨레스' 패션쇼 운영위원회도 너무 마른 모델들의 출연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변화는 아디 발칸(Adi Barkan)이라는 저명한 패션 사진작가가 꾸준히 전개해온 거식증 퇴치 노력의 성과다.

이스라엘 회사들, 저체중 모델 기용 않기로... "아름다우면서, 살아있게"

아디 발칸은 2004년 12월 30일 JPOST(이스라엘 현지 언론)와 만나 "오디션에 참가하는 1만2000명의 여자 모델 중 13.6%가 거식증에 시달리거나 시달렸던 경험이 있다"고 밝히고 자신 역시 패션계에 종사하며 이러한 "광기에 동참하는 죄를 저질렀음"을 시인했다.

이후 "아름다우면서, 살아있게"라는 슬로건을 권장한 아디 발칸의 노력은 업계 일각에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많은 경쟁사에서는 여성 모델이 건강상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발칸의 시도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성 모델에게 마른 몸매를 유지할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은 '실재'하며 "살아있게"라는 슬로건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수준이다.

실제로 지난 8월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 패션쇼에서 루이셀 라모스(Luisel Ramos)라는 22살의 모델이 워킹을 마친 다음 탈의실에 돌아와 사망했다. 의사는 직접적인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밝혔지만, 죽기 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언론에서는 진짜 사인으로 거식증을 꼽았다.

여성에게 44사이즈 권하는 한국 사회

 
▲ 44사이즈 마케팅으로 인기를 끈 쇼핑몰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과 우루과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델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한국의 직장인 여성 A(26)씨는 남자친구가 마른 체형을 좋아해서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본래 살이 별로 없는 작은 몸집이었는데, 다이어트 후 한 주먹도 안 되는 소량의 음식만 먹다보니 깡마른 체형으로 변했다. A씨는 "쇄골 드러난 것 좀 봐"라거나 "44사이즈 입겠다"는 친구들의 감탄에 기뻐하며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지난 여름 한국 사회에서 44사이즈 열풍이 불었다. 44사이즈는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를 차지했고 언론은 44사이즈 현상을 조명했다.

많은 여성들이 건강을 해치고 굶어가며 다이어트를 한다. 몸매가 드러나게 달라붙는 작은 옷이 여성에게 권장되는 것을 넘어, 이제 그렇게 권장되는 사이즈가 깡마른 정도인 44사이즈가 되었다.

사회학자인 코넬과 셸링은 몸의 형태와 잠재적 가능성이 사회적 관행과 맥락에 따라 형성되고 변화되는 물적 기반이 있다고 설명한다. 서구 사회에서 남성의 몸은 여성의 몸보다 건장한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남성이 아주 어릴 때부터 근육이 발달하는 스포츠나 게임을 하도록 권유받기 때문이다.

권력을 지닌 남성의 사회적 이미지는 근육의 강도·자세·몸의 느낌과 감촉 같은 것으로 자연적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남성의 우월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억압적인 관행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 사회문화적으로 조장된 것이다. 일례로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에서 등에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지고 원거리를 가는 사람은 반드시 버버족(Berber) 여성이다.

남성의 미적 선호에 맞춰지는 여성의 몸

한서설아씨는 <섹슈얼리티 강의 - 여성의 다이어트 경험을 통해 본 몸의 정치학>에서 여성의 몸에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이야기한다.

1920년대 들어 서구사회가 소비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가늘고 날씬한 몸을 지닌 여성이 '신식 여성'으로 위상을 확립했고 대중매체는 영화나 광고의 이미지를 통해 이를 확산했다.

또한 단 하나의 속성으로 대상을 환원해 다른 잠재적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은, 한 사회의 지배집단이 다른 집단을 차별하고 낮은 사회적 지위에 묶어 놓기 위해서 가장 흔하고 간편하게 사용하는 방식이다.

가부장제에서 몸 이외에 어떤 자원도 가질 수 없었던 여성들은 사회적 안정과 보상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몸을 남성의 미적 선호에 맞추어 변형시킨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강요되는 44사이즈의 마른 몸은 취업전선 등 공적 영역에서 다시 여성을 소외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여성들의 작고 연약한 모습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지만, 반대로 신뢰를 주지 못하며 권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이다.

깡마른 몸=표현의 자유?

 
▲ 세계여대생의 체질량지수. 한국 여대생이 날씬한 편인데도 다이어트 욕구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국제비만학회지
이스라엘의 관련 보도가 불러일으킨 '깡마른 모델 퇴출' 논쟁에서 법안에 반대하는 이들 중 혹자는 이것이 문화예술의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패션에 대한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에는 개인의 자유를 용납하는 것만큼이나 인권의 보호에 대한 사회적 원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본과 권력이 한 성(性)에 편중된 결과, 여성의 깡마른 몸이라는 취향이 이른바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나타난다. 이는 거식증이라는 병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며 수많은 여성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여성의 몸에 대한 기대를 극단화하는 패션계에서 최저체질량 지수에 대한 입법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외국의 소식은 고무적이다.

이는 '굶기'를 강요당하는 현대 여성들의 건강을 위해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보장하는 '최저임금제'인 셈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34조에서 인간다운 생활권, 32조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합치하는 근로조건 기준의 법률제정주의, 36조에서 보건에 관한 국가적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몸에 대한 정체성을 올바르게 형성하도록 하는 교육적인 차원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마른 몸에 대한 선호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매체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대응하는 방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더불어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를 위해 최저체질량 지수의 강제 기준치 등을 정하고 적절한 보건 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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