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감동시킨 …23일 국내개봉 큰 호평
재일 제주인 2세, 양영희 감독의 첫작품

▲ 영화 '디어평양' 포스터.
2006년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월드시네마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베를린 국제 영화제 '최우수 아시아영화상' 수상
야마가타 다큐멘터리 영화제 '특별상' 수상
싱가폴 Asian Festival of 1st films '최우수 다큐멘터리 감독상' 수상
바르셀로나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디지털 시네마상' 수상

이렇듯 세계영화계의 찬사를 받은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이 최근 국내에서 개봉(서울 CQN명동)되어 국내 영화계는 물론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제주출신 재일교포 2세 여성인 양영희씨다.

15살에 제주를 떠나 일본에 정착, 해방 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조국을 '북한'으로 결정, 조총련계 핵심 간부가 되고 이후 세아들을 북송시킨 아버지(양공선씨)와 그의 가족사를 그린 영화다.

제주출신 재일교포 조총련계 핵심간부 양공선씨와 그의 딸 양영희 

양영희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조총련'이 운영하는 학교와 가정에서 '조국'인 북한에 충성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 왔다. 하지만 평양으로 '귀국'한 오빠들을 만나러 북한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조국의 현실이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대에는 대화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버지와 함께 밥 먹는 것 조차 싫었다고 하는 양영희 감독. 양영희 감독은 온통 북한과 관계된 대화만 하는 부모님과 늘 이질감을 느껴왔다고 한다. 부모님들이 '조총련'의 간부인데다가 세 아들이 모두 평양에서 가정을 이루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 양영희 감독.
양영희 감독은 조선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연극을 했다. 아버지는 조총련계 교포와 결혼해 평범한 행복을 누리길 원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서서히 논픽션에 끌리기 시작했을 때, 사이 서른에 북한에 있는 조카들의 모습을 찍어주기 위해 디지탈카메라를 구입하게 되었고, 이후 실사의 매력에 푹빠지게 되었다.

그는 30대 중반에 다큐멘타리 공부를 하겠다며 뉴욕(뉴스쿨대학 미디어연구학과)으로 훌쩍 날아갔다. 9.11테러가 발생한 직후였고 미국이 북한과 국교도 없는 실정에서 당시 '조선국적'을 갖고 있던 양씨는 비자를 받는 것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오빠들이 평양에 있는데 여동생이 미국에 간다니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시켜준 카메라

<디어 평양>을 10년에 걸쳐 찍었지만 처음에는 가족의 기록을 찍을 생각이었고,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고. 아버지는 처음 3년동안은 아예 디지탈카메라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웃어보인적도 없었다. 그러나 점차 카메라를 가운데 두고 양영희씨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시 구축하기 시작한다.

절대 '조선'국적을 버리지 말라고 하던 아버지가 "너의 일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한국' 국적으로 바꿀 것을 허락하자, 양영희 감독은 많이 놀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뜨거운 신념에 앞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뜨거운 신념을 지닌 사상가 혹은 활동가였지만 그 보다 먼저 자신의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것이다.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이 후회스럽지 않냐는 솔직한 딸의 질문에, 똑같이 마음을 열고 솔직한 답을 들려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하며 양영희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신념은 다르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자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결혼상대만큼은 재일한국인이나 한국인은 괜찮지만 "미국놈이나 일본놈은 안된다"고 고집부리는 아버지다.

   
 
 
아버지는 예전에 한국에서 범죄자로 취급받던 자신이 주인공인데, 그런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됐다는 얘기에 크게 놀라워하며 좀처럼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다고.

국적은 바꾸어도, 결혼상대로 "미국놈이나 일본놈만은 안돼!"

양영희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북한에 있는 오빠들의 입장을 고려해 감정을 자제하면서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가족들을 모자이크처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보여주어야 한다면그 모습 그대로 인정을 받는 편이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는 것라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은 일본에 실재하는 재일 교포 가정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슴 벅찬 감동을 전해주고, 무엇보다 실제적인 북한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내고 있다. 특히 <디어 평양>에 내재되어 있는 갈등의 한 축이 제주 및 한반도의 아픈 역사적 틀 안에서 자란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특별히 다가온다.

첫작품 <디어 평양>이 호평을 얻으면서 그의 두번째 작품 <선아, 또하나의 나>역시 주목을 받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다큐멘터리 네트워크(ADN)'의 공식후원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에 거는 기대도 크다.

   
 
 
<디어 평양>에는 이러한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아버지, 고향인 제주도보다 평양이 좋으세요?" 아버지는 연신 카메라를 향해 손사래치면서도 "그럼 그럼!"이라며 맞장구친다. 조총련으로 평생을 살아오며 고향인 제주도보다 평양을 좋아한다는 양공선씨, 그는 진정 제주보다 평양을 좋아하고 있을까? '신념의 고향'으로 평양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면, '마음의 고향'으로 제주는 여전히 가슴 한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을 지 모른다. '디어 제주'로...신념에 앞서 가족사랑의 깊은 내면을 보여주고 있는 그이기 때문이다. 

양감독과 아버지의 고향, 제주에서는 언제나 이 영화를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이 기사는 '디어 평양' 블러그(blog.naver.com/dpy2006)에 있는 자료를 인용하여 재구성했습니다> 

<시놉시스>

나는 '재일 교포의 메카'로 불리 우는 도시,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빠 셋의 귀여운 막내 여동생으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15살에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오셨고 해방을 맞은 후 정세에 따라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첫 눈에 반해 열렬히 프로포즈하여 결혼에 성공하셨다고 하는데, 평소 엄격한 성격의 아버지도 이 얘기가 나올 때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시곤 합니다. 부모님은 결혼 후 함께 열정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셨고, 오빠들이 청소년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국'인 북한으로 보낼 결심을 하셨습니다.

오빠들이 떠나던 날. 6살이었던 나는 '귀국'의 의미도 모른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오빠들을 태운 배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셨습니다. 나는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후 평양의 실정을 들은 어머니는 오빠들에게 물자를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린 조카가 난방이 안된 학교에서 동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이런 짓은 어미 밖에 못해준다"고 웃으시면서 겨울마다 큰 상자에 일회용 손난로를 가득 담아 보내주고 계십니다.

오빠들과 달리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나는 자연히 아버지와 갈등이 깊었고, 심지어 대화조차 안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카메라에 담아 볼 것을 결심했고 10년간 렌즈를 통해 아버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점차 변해 갔습니다. 머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이 가슴으로 다가오며, 미움은 그리움으로, 갈등은 사랑으로 변해갔습니다. 어느 날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이 후회 되냐고 묻는 나에게 아버지는 진솔한 답변을 해 주셨고 난 앞으로 아버지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곧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고, 나는 아버지와 좀더 일찍 대화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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