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에서 만난 재일제주인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지위에 오르기까지 이들은 혹독한 차별과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재일제주인 2세 혹은 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일본에 온 후에 경험한 일들을 듣고 있자니 저절로 숙연해져왔다.

김창희(55·대정읍 영락리 출신)씨는 “일본에서 아버지는 도둑질하는 일과 사람 죽이는 일 빼고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할 정도로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며 “고용주가 써주기만하면 뭐든지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재일제주인들은 일본에 오자마자 신발공장, 가방공장, 플라스틱공장의 허드렛일이나, 식당일, 용접, 파칭코, 오징어잡이 등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 또한 낮에는 고된 일을 하는 동시에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는 재일제주인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재일제주인 1세들이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2세들에게서도 인내와 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가족 모두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똘똘 뭉쳐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 특유의 정신이 깃들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김광일 관동제주도민협회 부회장(57·제주시 삼양동 출신)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24시간 내내 교대를 해가며 야키니쿠(갈비) 장사를 했었다”며 “예전 야키니쿠 장사를 했을 때, 생각만 해도 두번 다시 하기 싫고 내 자식들한테도 그렇게 힘든 일은 물려주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감자밥도 제대로 못 먹었던 시절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조냥정신을 배운 제주인 특유의 기질 여전”

그렇게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경에서 열심히 살아온 덕에 외국인이지만 일본인들이 무시하지 못하는 부와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재일동포들은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선생님과 같은 공무원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고 일류기업에서 승진을 할 수 없는 등 직업선택의 폭이 좁았고 차별이 심했다.

조선공학을 전공한 정평보 관동제주도민협회 회장(67·서귀포시 토평동 출신)은 “일본에서 용접 면허장을 발급하는 사단법인 일본용접협회에서 근무했었다”며 “그러나 일본공사에 들어갈 때 한국이름을 사용한다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교수님의 걱정 때문에 원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화영 제주대신문 기자
그는 “그 곳에서 30세 때 과장을, 49세 때 사무국장을 지냈고 퇴임하기 4년 전, 56세 때는 전무이사를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지만 일본 국적이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직업선택의 한계 때문에 재일동포들은 야키니쿠(갈비)와 같은 식당업, 파칭코 등의 사업을 주로 했고 이들 특유의 인내와 끈기 그리고 서비스 정신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는 제주에서 감자밥도 제대로 못 먹었던 시절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자연환경의 혹독함에 견디는 법을 배운 제주인 특유의 기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상황 속에서 이들이 이뤄낸 성공담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제주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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