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소리 창간 15주년 초청공연 인터뷰] 데뷔 40주년 전국투어 첫 무대 4월13일 제주서

정태춘과 영혼의 단짝 박은옥(왼쪽).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한국적 포크를 노래한 음유시인 정태춘과 그의 영원한 동지 박은옥(왼쪽).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데뷔 40주년 첫 공연을 4월 13일 오후 7시 제주아트센터에서 연다. 사진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누군가는 말한다.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와 노랫말이 영문으로 알려졌다면 음악가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밥 딜런'이 아니라 '정태춘·박은옥'이었을 수 있다고.  

시대의 동지로서 노동자와 민초들을 위해 목 놓아 부르짖고, 일제때부터 이어져온 음반 사전검열이라는 잔재를 걷어치운 장본인, 정태춘. 40년 세월을 문화예술과 삶의 동반자로, 정태춘의 거칠고 건조했을 음악인생에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준 반려자, 박은옥. 

'한국적 포크를 노래한 음유시인' 정태춘·박은옥. 두 사람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전국순회공연의 첫 무대를 4월13일 제주에서 연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창간 15주년을 맞아 시대와 함께 걸어온 거장 정태춘·박은옥을 제주 무대에 초청했다. 전국 순회 공연의 첫 무대를 제주에서 여는 자리이기도 하다. 4월13일(토) 오후7시 제주아트센터.   

20~30대에게는 두 사람이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그 윗 세대들에게는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는 추억과 묵직한 힘을 선사하는 이름이다. 정태춘은 1954년생 1978년 데뷔, 박은옥은 1957년생 1979년 데뷔. 어느새 음악인으로 살아온 지 만 40년을 맞는, 굳이 표현하자면 원로가수 부부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중의 인기로 먹고사는 대중가수로서 살기를 스스로 원치 않았기에, 두 사람을 가요프로그램이나 예능프로그램 등 방송에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40년 세월을 오롯이 노래로 시대와 저항해온 거장이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우리한테 정태춘과 같은 레알 음악가가 있다는 것은 실로 행운이요, 축복이다.’

정태춘 팬카페에서 ‘카페 활동 전에 정독을 권장한다’고 소개한 위키 홈페이지의 가장 위쪽에 박힌 정태춘 소개 문구다. 두 사람의 데뷔 40주년을 맞아 지난 1월말 발족한 정태춘·박은옥 데뷔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한국 대중문화에 미친 두 사람의 영향과 깊이를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공연, 전시, 학술사업을 추진한다. 바로 이 40주년 기념사업의 핵심인 전국투어 공연의 첫 발은 제주에서 뗀다. 

2월 22일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한 구석 정태춘·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제주의소리]는 정태춘을 만났다. 

다소 마른듯해도 단단한 체구,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처진 눈매와 주름 속에도 초점을 잃지 않은 눈빛은 강렬했다. 어떻게 보면 그를 모르는 사람에겐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이라기보다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아 보일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여전히 힘있고 묵직했다. 

정태춘. ⓒ제주의소리
정태춘. ⓒ제주의소리
인터뷰 중인 정태춘. ⓒ제주의소리
인터뷰 중인 정태춘. ⓒ제주의소리

통기타 연주와 담담하면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을 달리하는 노래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가사'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빗긴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 ‘시인의 마을’(1978) 중에서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 ‘떠나가는 배’(1983) 중에서

주변의 모든 것에 눈뜨던 시절 / 진실을 알고자 난 헤매였네 / 귀를 열고, 눈을 똑바로 뜨고 / 어설프게나마 나는 듣고 보았네 / 서울로 서울로 모이는 군중들 / 지식의 시장에 늘어선 젊은이 / 예배당 가득히 넘치는 찬미와 정거장마다엔 떠나는 사람들 / 영웅이 부르는 압제의 노래와 젖은 논 벼 베는 농부의 발자욱 / 빛 바랜 병풍과 무너진 성황당 / 내 겨레 고난의 반도땅 속앓이를 - ‘얘기 2’(1988) 중에서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 ‘아, 대한민국...’(1990) 중에서

다시는 /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중에서

동호대교 위론 바다 갈매기가 날고 / 철로 위론 전철이 지나가고 / 강물 위로, 고요한 그 수면 위로 / 유람선이 휘, 지나가고 / 강변도로 질주하는 자동차들 / 가파른 강둑 풀을 뽑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 압구정은 어디, 압구정은 어디 - ‘압구정은 어디’(2002) 중에서

먼 세기 울산만의 신화도 아득하고 / 소년들의 포구도 사라지고 / 문 닫힌 컨테이너 그 옛날 매점 간판만 / 숲으로 가는 길을 막고 섰네 / 다만, 어린 고래여, 꿈꾸는 고래여 / 붉은 산호들 춤추는 심해는 어디 / 어기야 디야, 저녁 숲 속의 바다 / 어기야, 거기 서 있는 고래여... - ‘저녁 숲 고래여’(2012) 중에서

데뷔때부터 불러온 정태춘의 노랫말을 쭉 살펴보면 지난 시간 동안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었는지 잘 드러난다.

밤이 오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잔잔한 서정은, 한국사회가 처한 사회·정치적 문제에 눈 뜨며 밑바닥 서민들의 아픔까지 공감하는 실천적인 공감으로 진화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지켜보며 자칫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을 위해 고요하지만 깊은 성찰의 노래로 화답해왔다. 

맑고 향기로운 것만 이야기하는 예술이 아닌, 거친 현실부터 사회 구조의 부조리까지 살피는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더욱이 무소불위의 군사 정권을 온 몸으로 부딪히면서 현실참여적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기에, 오늘 날 사람들을 그를 미국의 저항음악 가수 '밥 딜런'과 비교하는데 기꺼이 주저함이 없다. 

사회 부조리를 정면으로 꼬집는 정태춘의 메시지는 지금 세대들에게도 유효하다. 90년대 이미 그의 노랫말에 '최저임금'이 등장한다. 음원 플랫폼에 등록된 정태춘 곡을 듣고 젊은 세대들이 '놀라움' 속에 남기는 댓글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정태춘의 예전 활동 모습.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의 예전 활동 모습.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의 예전 공연 모습.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의 예전 공연 모습.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은 수십 년 이어온 한국 사회의 각종 적폐에 눈감지 않고, 격동의 현대사를 몸소 부딪혀 걸어온 '음악 투사'로도 불린다. 대표적으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음반 사전심의 제도를 철폐한 주역이기도 하다.

1990년 발표한 앨범 ‘아, 대한민국...’의 수록곡 대부분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자 저항의 의미로 불법음반을 과감히 제작했다. 검찰 기소에 맞서 사전심의에 대한 헌법 소원을 청구한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길고긴 사전심의 철폐운동을 펼친 끝에 1996년 드디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서태지 세대들 중 더러는 '시대유감' 파동에 의해 서태지가 사전심의 폐지를 이끌어낸 것으로 알지만 (촉발제가 된 것은 사실일지라도) 그 공은 전적으로 정태춘과 박은옥 부부의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뿐 만이 아니다. 그의 고향인 평택 대추리, 도두리 미군기지 반대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80~90년대 민주화 시기에는 각종 시위, 집회 현장을 찾아 노래로서 세상과 맞섰다. 정태춘을 단순한 포크 가수와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그 이상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정태춘은 정부의 사전심의 제도 철폐를 위해 앞장섰다.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은 정부의 사전심의 제도 철폐를 위해 앞장섰다.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은 정부의 사전심의 제도 철폐를 위해 앞장섰다. 전남대학교에서 정태춘과 손석희 현 JTBC 사장이 함께 찍은 모습.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은 정부의 사전심의 제도 철폐를 위해 앞장섰다. 전남대학교에서 정태춘(앞줄 가운데)과 손석희(정태춘 오른쪽) 현 JTBC 사장이 함께 찍은 모습.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2006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운동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는 정태춘.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2006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운동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는 정태춘. 평택 대추리는 그의 고향이다. 한때 이곳에서 그는 경운기를 몰며 농사를 짓기도 했다.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의 전성기 때 음악은 오늘 날의 ‘음악’과 달랐다. 정성들여 만든 노래를 꽉꽉 눌러 담아 앨범을 녹음해 발표하고, 소극장과 현장 무대를 찾아 노래하던 시절의 음악. 이제는 LP 또는 테이프나 CD도 없이 손에 잡히지 않는 ‘음원’으로 제작되고, 그것도 모자라 듣는 음악에서 '유튜브'라는 플랫폼에서 보는 음악으로까지 탈바꿈했다.

음악이 더 이상 ‘예전 음악’이 아닌 시대가 되자, 정태춘은 과감하게 음악을 접었다. 2002년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이후 2012년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내기까지 10년간의 공백 동안, 정태춘은 음악 작업 대신 사진, 가죽 공예, 한시 등 다른 일에 몰두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다.

정태춘은 “나의 음악은 크게 세 단계로 변화해 왔다. 개인의 일기, 우리들의 일기, 마지막으로 자기 성찰의 일기다. 처음에 음악은 내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의 분노가 사람들의 분노로 옮겨가면서 나의 일기는 우리들의 일기가 됐다. 그것은 사회나 당대 역사에 관한 문제의식이 폭넓게 공유될 때만 가능했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 (음악 창작의) 힘이 빠졌다. 열정적인 분위기에서 빠져나오면 의욕이 사라질 수도 있고, 대중과 연대감이 서서히 상실되면서도 의욕이 떨어진다”고 솔직한 속내를 밝혔다.

더불어 “그래서 나의 다음 작업은 대중들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고민하게 됐다. 그것이 자기 성찰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3단계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정태춘은 음악 산업 자체가 뿌리 채 달라지면서, 음악 예술에도 영향을 주는 시대 흐름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시장에서 생존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 받는 시대가 됐다. 음악도 ‘팔리는’ 상품만 존재한다. 나는 이런 상황이라면 빠지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만든 음악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내놓고 판매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지독하게 상업적인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기에, 그 열차에서 뛰어내리겠다고 결정 내렸다”고 설명했다.

또 “음악으로서 내 이야기를 하겠다는 생각은 이제 없다. 40주년을 기념하는 새 앨범이 나오지만 거기까지”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모습에서 음악인으로서 남다른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정태춘은 음악 제작 대신 ‘붓글 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스스로 서예라기 보단 붓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는 의미로 '붓글'이라 명명했다. 경향신문이 그의 붓글 작품을 격주로 정기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정태춘은 “붓글은 텍스트로서 내가 의도하는 생각을 텍스트로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 무척 매력적이다. 실력은 많이 부족하지만 조형적인 작업으로서 재미가 있다”며 “남은 생애는 붓글을 쓰면서 보내게 될 것 같다. 음악은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하나의 수단이자 도구다. 나에게는 지금의 이야기가 있다. 앞으로 내 이야기는 붓글로서 전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정태춘은 2002년부터 10년간 음악을 접고 가죽 공예, 붓글 등에 매진했다.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은 2002년부터 10년간 음악을 접고 가죽 공예, 붓글 등에 매진했다.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의 붓글 작품.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의 붓글 작품.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의 붓글 작품 '연북정', 제주의 ⓒ제주의소리
정태춘의 붓글 작품 '연북정',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연북정의 역사, 의미를 살폈다. 제공=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주의소리

정태춘은 스스로 제주와의 인연을 가볍지 않다고 말한다. 홀연히 전국을 떠돌았던 20대 시절 제주도에 와서 이시돌목장 등 제주 곳곳에서 사유하기를 즐겨했고, 제주의 유채밭에서 유채씨를 털어 모으는 일을 했던 청춘의 기억 등은 절로 그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떠나가는 배’는 원제가 이어도였고, 최근 시작한 붓글 작품 가운데는 조천 연북정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 작품도 있다. 제주로 이주까지 고민했었단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전국 순회공연 당시 제주를 찾았고, 1990년대 초반에는 제주대학교 잔디밭에서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도 공연했다. 그 뒤로도 제주에는 자주 왔다”며 “많은 지인들이 제주로 와서 살고 있는데, 나도 살아볼까 하는 마음에 이주를 심각히 고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4월 13일 전국 투어의 첫 시작을 제주도민과 [제주의소리] 독자들 앞에서 시작하는 소감을 물었다.

정태춘은 “제주도는 우리 부부에게 아주 각별한 애정이 담긴 땅이다. 여전히 살고 싶은 선망의 섬이기도 하다. 그동안 많이 오가면서 특별한 인연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주에서 공연을 시작하게 됐다”면서 “최근 내 딸의 제안으로 20대 때 노래를 다시 불러보는 앨범을 만들고 있다. 젊은 시절보다 '늙은' 목소리가 더 좋다고 하더라. 앨범처럼 제주 공연 역시 지난 세월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라이브 공연이 되겠다. 늙는다는 것이 쓸쓸하겠지만 그 자체를 즐기면 되지 않나. 관객들 가운데는 늙은 우리 부부 무대를 보면 쓸쓸해진다는 분들도 있다. 나도 여러분도 같이 쓸쓸해지자. 하하. 그렇게 살아가자”고 웃어보였다.

정태춘, 박은옥 40주년 전국투어 콘서트 제주 일정은 4월 13일 오후 7시 제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예매는 인터파크 티켓 홈페이지 ( https://goo.gl/74qRSZ )를 이용하면 된다. <서울=한형진 기자>

활짝 미소 짓는 정태춘. ⓒ제주의소리
제주와의 인연을 이야기 하면서 활짝 미소 짓는 정태춘.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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