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특별기고] 전갑생 서울대 연구원, '4.3난민' 발굴 영상을 말하다

올해 초 언론을 통해 공개된 영상 자료가 화제를 일으켰다. 1949년 일본에서 부산으로 향한 여객선을 촬영한 미군 영상과 관련 서류는 제주4.3 난민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주의소리]가 창간 15주년을 맞아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서 자료를 찾은 전갑생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을 통해 발굴 자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영상에서 한 무리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앞줄에 앉은 사람은 손에 우산을 들고 있고 같은 줄에 한 사람은 보따리가 앞에 놓여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주전자를 들고 있고 간혹 여성이 눈에 뜨인다.

1949년 3월 5일 16통신중대 소속 영상 촬영병 마크스(Marks)가 3월 4일 오후 5시 사세보항에서 출발한 다치바나 마루(橘丸)에 승선해 다음 날 오전8시 부산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마크스는 영상현장설명 카드에 ‘프로젝트(PROJECT) 8A 505 : 1949년 3월 일본 큐슈 34보병연대 파견대에서 운영되는 사세보송환센터 하리오 섬’이라는 제목과 “‘불법체류’ 무리는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다”고 설명문을 기입했다. 

1949년 3월 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여객선 승객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사진 뒷편에는 검문하는 사람도 보인다. 이 가운데는 일본에서 강제 추방되는 제주도민들도 포함돼 있다. 제공=전갑생. ⓒ제주의소리
1949년 3월 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여객선 승객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사진 뒷편에는 검문하는 사람도 보인다. 이 가운데는 일본에서 강제 추방되는 제주도민들도 포함돼 있다. 제공=전갑생. ⓒ제주의소리

‘프로젝트 8A 505’는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지시에 따라 1946년 4월부터 재일조선인의 귀환과 강제 추방 과정 등을 촬영한 기획물 번호이다. 16통신중대는 1946년 4월 15일부터 1949년 7월 15일까지 미 육군 24보병사단 34보병연대(1926.2.28∼1949.12.11, 하리오 주둔)에 배속되어 나가사키 현의 사세보와 하리오(針尾) 입국자수용소 또는 억류자수용소(사세보시 하리오지구 하리오니시마치, 지금의 기념공원과 자료관으로 바뀜)에서 강제 추방되는 재일조선(한국)인들을 근접 촬영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난 해 10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필자가 발굴한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조국’을 등진 게 아니다. 이들은 가족들을 만나고자 ‘밀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난민이며 국가폭력에 내몰린 존재였다. 왜, 이들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을까. 해방된 나라에서 ‘반역자’처럼 낙인된 사람들, 일본에서 ‘불법입국자’ 혹은 ‘빨갱이’라고 지목된 그들은 누구일까.

쫓겨나는 재일조선(한국인)들

다치바나 마루에 승선한 사람들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일본에 거주한 재일조선인과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환 뒤 다시 가족 등을 재회하고자 일본으로 재입국을 시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재일조선(한국인)이다. 하리오수용소(1950.12.28 오무라 수용소로 명칭 변경)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집단 귀환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재입국을 시도하다가 체포돼 일시 감금하던 곳이다. 

왜, 재일조선인과 한국인들은 강제 추방되었는가. GHQ는 1945년 8월 15일부터 일본 거주 모든 조선인들에게 ‘귀환자’로 등록할 것을 명령하고 부산-사세보를 운항하는 귀환선을 지정했다. 얼마 뒤 GHQ는 1946년 2월 17일 각서를 발표하고 3월 13일까지 일본에 있는 모든 조선인, 중국인, 류큐인, 대만인 등에게 “귀환에 대한 희망 유무를 등록할 것”과 3월 18일까지 등록하지 않으면 “귀환의 권리가 상실된다”고 강제 귀국을 재차 압박했다. 재조선미군정청은 GHQ의 명령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조선에 입국 또는 출국자 이동의 관리 및 기록 건”을 공포하고 ‘집단귀국자’에 한해 해외여행을 제한한다고 선포했다. 

대다수 ‘귀국자’들은 일본에 남겨둔 가족 방문 및 결합 차원에서 재입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48년 4.3 이후 제주도 사람들은 국가 폭력에 저질러진 학살을 피해 오사카 등지로 ‘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24사단 정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4월 3일 하리오 수용소에 재입국을 시도하다가 체포된 재일조선인은 58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4월 23일 363명, 5월 14일 519명으로 격증했다. 24사단은 “1948년 4월부터 12월까지 하리오수용소에 재일조선인만 6940명이고 밀항선 51척을 나포했고 138척이 도망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매일 사세보항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강제 추방선박에는 최소 200여 명에서 최대 600여 명의 재일조선(한국인)이 승선하고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 고향을 등지다

1949년 1월부터 12월 사이 9345명 중 6630명이 하리오 수용소에 수용되고 나머지 2807명만이 체포되지 않았다. 밀항선박은 520척으로 더 늘어났다. 이들 재일조선(한국)인들은 나가사키, 야마구치, 후쿠오카, 오사카 등지에서 체포되었는데 한국의 출발지가 부산, 여수, 거제, 제주도 순으로 많았다. 

1949년 1월 이후 제주도 상황은 어떤 모습일까. 1월 22, 27일 육군본부는 작전명령(22, 44호)에 따라 ‘제주도지구 소탕작전을 철저히 실행’한다고 2연대와 6여단 유격대를 중심으로 제주도지구 전투부대를 조직했다. 비슷한 시기 3월 18∼24일 GHQ보고서에는 “제주도 등지에서 밀항선을 타고 입국하려는 자가 592명”이며, 3월 21일 주한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보고서에는 “제주도에서 게릴라 58명과 포로 27명을 체포했으며, 지난 2월 26일까지 2200명이 국군 2연대 본부에 자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보고서에서 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 해병대에 4척의 순찰선을 추가로 배치한 뒤 해안선 일대에 순찰강화”하도록 지시했다. 한국군 명령서나 미군 보고서에서 제주도는 대규모 군사작전이 벌어지는 곳임을 알 수 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미군정보부에서 작성한 제주도와 여수 등지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표시한 지도(출처 RG 331, Subject File, 1945 - 1951_Entry UD 1134, Box 260, 1949) 제공=전갑생. ⓒ제주의소리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미군정보부에서 작성한 제주도와 여수 등지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표시한 지도(출처 RG 331, Subject File, 1945 - 1951_Entry UD 1134, Box 260, 1949) 제공=전갑생. ⓒ제주의소리
주한미군정청에서 작성한 제주도 지도(출처 RG 331, Subject File, 1945 - 1951_Entry UD 1134, Box 260, 1949). 제공=전갑생. ⓒ제주의소리
주한미군정청에서 작성한 제주도 지도(출처 RG 331, Subject File, 1945 - 1951_Entry UD 1134, Box 260, 1949). 제공=전갑생. ⓒ제주의소리

이처럼 1949년 제주도에서 상당수 사람들이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시기 여수나 남해안 일대에서도 동일하게 밀항선을 타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목숨을 건 탈출은 일경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하리오 수용소를 거쳐 다시 한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이들은 형무소에서 수감된 뒤 다시 일본으로 재입국을 시도했다. 왜, 이들은 여러 번 한국을 떠나려고 했는가. 

재입국 시도자들, 내부의 ‘적’이 되다

1949년 1월~4월 사이 한미군의 작전 또는 정보보고서에는 제주도 관련 내용에 ‘반도(叛徒)’, ‘게릴라’, ‘소탕’, ‘섬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전히 정부는 제주도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국내 일간지에는 ‘일본이 그립든가’(동아일보, 1949.1.14)라고 일본에서 추방되어 오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제주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군경에 의해 대규모 학살되거나 다시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에 몸을 숨겨야 했다. 재일조선인들은 한국이나 일본정부에 ‘빨갱이’ 또는 ‘공산주의 협력자’라고 둔갑해 강제 추방되었다. 

1948년 4월부터 한국전쟁기 사이 생존을 위해 제주도를 떠나 일본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돼 한국에서 처벌 받은 사람들은 몇 명인지, 한국전쟁기 일본에서 강제 추방돼 여러 형무소에서 흩어져 보도연맹원 학살 때 사라진 재일조선(한국)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앞에 영상에서 나온 사람들은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이번 영상에서 아직도 풀어야 할 과거사가 많은 한미일 관계에서 제주4.3과 추방된 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 전갑생

경남 거제시 출생. 민주화운동, 지역시민사회운동에 투신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으로 한국전쟁과 지역사를 연구한다. 저서로 '한국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 '거제이야기100선', '일운면사', '국가폭력과 전쟁', '부산의 도시형성과 일본인들'(공저) 등이 있다. 논문은 '한국전쟁기 간첩담론', '한국전쟁기 오무라수용소(大村收容所)의 재일조선인 강제추방에 관한 연구', '거제도 포로수용소 설치와 포로의 저항', '1920년대 거제지역 청년운동 연구',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의 현황과 과제'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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