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10. 연자매에 앉은 놈이 고추장 타령한다

* 몰고레 : 말방아, 연자매(말을 부려 찧는 방아) 방언으로 ‘몰방애’라고도 함
* 앚인 : 앉은, 앉아 있는
* 고치장 : 고추장

방앗간에 앉은 사람이 벌써부터 고추장 타령을 한다. 사리분별 이전에 그야말로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 아닌가. 사람이 무슨 일을 하거나 처신을 함에 적어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살펴 행동해야 한다. 어디 세상이 호락호락하기나 한가. 철딱서니 없이, 분수도 모르고 덤벼든다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말방아로 찧을 것을 찧어 마련을 해야 고추장이든 된장이든 담글 게 아닌가. 방아에 앉아마자 고추장 타령부터 하고 있으니 되게 성급한 사람이다. 

‘우물에 가 숭늉 찾는 소리’다. 우물가에서 웬 숭늉인가? 일의 순서도 모른 채 무조건 화급히 덤빈다는 말이다.

솥에서 밥을 푼 뒤,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긁지 않고 물을 부어 오랜 시간 은근히 끓이면 구수한 맛이 나는 숭늉이 된다. 그 구수함이란 마셔 본 사람은 버릇이 돼 식후에 찾게 돼 있다. 오죽 입에 당겼으면 옛 어른들이 숭늉을 식후에 으레 찾았겠는가. 후세로 내려오며 ‘국산 커피’라 했다. 식후 입가심으로 즐겨 마셨다는 얘기다. 오래 끓여야 하고, 밥을 먹고 난 뒤에 먹는 음식을 우물가에 가서 찾으니 있을 리가 있나.

일에는 질서와 차례가 있는 법인데, 일의 순서도 모르고 조급하게 달려든다는 말이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꿰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우리 주위에 일을 급하게 처리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로 볼 수 있으리라. 

문득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 떠오른다. 화자가 길가에서 방망이 깎는 노인에게 다듬이 방방이 한 벌을 부탁했더니,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깎고 또 깎는다. 타고 갈 차 시간이 빠듯해 재촉하자 그 노인 퉁명스레 “끓을 만큼 끓여야 밥이 되지 재촉한다고 생쌀이 밥이 되나. 딴 데 가서 사시오”라 했다. 자신이 만드는 물건에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장인(匠人)의 모습이다. 아무나 ‘장이’가 되는 게 아니다. 화가가 노인이 깎은 방망이를 집에 갖고 가 아내에게 칭송을 받지 않았나.

한국인의 성격을 얘기할 때, 한마디로 ‘빨리빨리’라는 말을 흔히 쓴다. 어떤 일이든지 빨리빨리 처리하고 빨리빨리 그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는 것. 한국에 머문 적이 있는 외국인들에게 아는 한국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무어냐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꺼내는 말이 ‘빨리빨리’다. ‘빨리빨리 문화’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일 처리를 빠르게 한다는 것은 큰 장점일 수 있다. 하지만 일이란 것은 반드시 순서가 있는 법, 제대로 처리하려면 여러 조건이 맞아야 할 뿐 아니라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서두른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뚝딱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에 쫓기다 보면 뜻밖에 실수가 생기고 일의 완성도도 떨어지고 만다. 꽃씨를 심어 놓고 다음날 꽃이 피기를 바랄 수 없음과 같은 이치다.

일이란 빠르게 해야 하는 게 있고,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진행해야 되는 게 있다. 각기 필요한 기간과 성과를 충분히 고려해서 우선순위를 정한 뒤 꼼꼼히 해내는 습관에 길들여져야만 한다.

‘두더지 땅 파듯’이란 속담이 있다. 두더지는 땅굴을 팔 때 오로지 두 발로써 판다. 다른 도구 없이 딱딱한 땅을 파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우직하게 발로 파 들어간다.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꾸준히 노력하라는 함의(含意)를 지닌다.

말방아를 돌리는 모습. 출처=제주도청 홈페이지.
말방아를 돌리는 모습. [편집자] 출처=제주도청 홈페이지.

공자도 “쉬운 일일지라도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에 한눈팔지 마라. 서두르면 성공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눈을 팔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했다.

어떤 일이든지 급하게 밀어붙이지 말고 일의 순서와 그때그때의 상황을 잘 살펴서 해야 하라는 교훈이다.

선인들은 서두르지 말라, 일에는 차례가 있다고 가르쳤다.

‘견란구계(見卵求鷄)’란 말이 있다. 계란을 보고 닭이 되어 새벽 알리기를 바란다 함이다. 급하다 급하다 해도 이보다 급할까.

장자에 문답이 실려 있다.

구작자(瞿鵲子)란 사람이 스승 장오자(長梧子)에게 물었다.

“제가 공자에게서 들었는데, 성인은 속된 일에 종사하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고 도를 따르려고도 하지 않으며 말을 안 해도 말함이 있고 말을 해도 말함이 없으며 멀리 속세를 떠나서 노닌다 했습니다. 맹랑한 얘기 같사오나 미묘한 도의 본질이 발현된 것이라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오자가 답했다.

“…자네도 속단하는데, 계란을 보고 새벽을 알리기를 바라는 것이나, 탄환을 보고 그 자리에서 새 구이를 찾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네.”

이후, 이 말을 간추려서 지레짐작하는 경솔한 판단을 하거나 너무 급히 서두르는 비유로 인용해 온다.

비슷한 말들이 많다. ‘콩밭에서 두부 찾는다’, ‘돼지꼬리 잡고 순대 달란다’, ‘갓 쓰고 똥 싸랴’, ‘첫 술에 배부르랴’, ‘싸전에 가서 밥 달라 한다.’ 

옛날 어른들도 어지간히 성깔이 급하긴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방앗간에 앉아 고추장 타령을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어불성설이다. 일이란 자칫 실수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인 법. 기획에서 추진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치밀히 살피고 가늠해야 하리라. 우리는 너무 성급한 것 같다. 속담이 많은 게 어찌 우연이랴.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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