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기획-3.1운동 100주년 제주항일史] ④ 해녀항일운동, 부당착취 맞선 저항 '활활'

해녀투쟁 주역들이 다녔던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사진. 윗줄 왼쪽부터 홍문봉, 부춘화, 김봉혁, 김옥련, 송순옥, 부덕량, 고순효 학생, 아랫줄 왼쪽부터 문무현, 부대현, 김남석 강OO, 김태륜 교사. 가운데 선 인물은 부춘화 열사의 오빠인 부승림. 사진=제주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해녀투쟁 주역들이 다녔던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사진. 윗줄 왼쪽부터 홍문봉, 부춘화, 김봉혁, 김옥련, 송순옥, 부덕량, 고순효 학생, 아랫줄 왼쪽부터 문무현, 부대현, 김남석, 강OO, 김태륜 교사. 왼쪽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은 부춘화 열사의 오빠인 부승림. 사진=제주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아직도 발굴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독립운동은 더 깊숙이 묻혀왔습니다.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중략)

1932년 제주 구좌읍에서는 일제의 착취에 맞서 고차동, 김계석, 김옥련, 부덕량, 부춘화, 다섯 분의 해녀로 시작된 해녀 항일운동이 제주 각지 800명으로 확산되었고,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7천명이 238회에 달하는 집회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지금 구좌에는 제주해녀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중략)

광복을 위한 모든 노력에 반드시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예우를 받게 하겠습니다.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낼 것입니다. 묻혀진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믿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사 중

1932년 발발한 '해녀항일운동'은 제주 항일의 역사를 뒤흔든 이정표로 남아있다. 1000여명에 달하는 해녀들이 일본인 관료를 에워싼 구좌읍 옛 세화오일장터는 제주를 대표하는 항일운동의 성지 중 한 곳이다.

지난해 8월 15일 광복 73주년을 맞아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묻혀있던 독립운동사를 완전히 발굴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당시 해녀항일운동의 주역인 제주 해녀 5명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간 그늘진 곳에 가려져있던 해녀항일운동 역시 새롭게 조명되는 기회가 열렸다.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인 해녀항일운동은 제주지역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더한다.

특히 단순히 여성 독립운동가가 참여한 운동을 뛰어넘어 여성이 주체가 돼 여성을 중심으로 이뤄진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다. 반 세기 전에도 여성들이 시대를 이끌었다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녀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해녀항일기념탑. ⓒ제주의소리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녀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해녀항일기념탑. ⓒ제주의소리

◇ 해녀조합 변질시킨 제주도사의 착취...악덕상인 기승

1932년 발발한 해녀항일운동의 역사는 10여년 전인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4월 16일 창립된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은 설립 초기 해녀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지만, 1920년대 중반 일본인 제주도사(濟州島司, 현 제주도지사)가 해녀조합장을 겸임하면서부터 오히려 해녀들을 착취하는 기관으로 변질됐다.

해녀가 채취한 미역, 천초, 감태, 전복 등은 대부분 조선해조주식회사에 의해 판매되는데, 이중 50%는 수수료 명목으로 회사에 지불하고, 18% 가량은 조합 수수료 명목으로 납부해야 했다. 조합비, 사공 임금, 거간 사례비 등을 제하다 보면 정작 해녀들에게 들어오는 실수입은 전체의 20% 정도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해녀조합은 해녀들이 채취한 물건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특정 상인들의 배만 불리는 등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맑은 날보다 전복이 2~3배 가량 더 많이 잡히는 비가 오는 날이면 전복 값을 절반 이하로 깎거나 아예 사주지 않았다. 생전복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던 해녀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헐값에 해산물을 판매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녀박물관에 세워진 해녀항일운동 애국지사 흉상. ⓒ제주의소리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녀박물관에 세워진 해녀항일운동 애국지사 흉상. ⓒ제주의소리

이 같은 형태로 수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일제의 수탈은 1930년에 이르러서는 수확물의 경매가격을 하향 책정하는 등 횡포가 극에 달했다. 성산포에서는 해녀조합의 일본인 관리들이 당시 우뭇가사리의 시세를 반 값에 매입하면서 해녀들의 반발을 샀고, 1931년 구좌면 하도리에서도 턱 없이 낮은 가격에 수확물 가격을 책정했다.

어용조합이 된 해녀조합을 대신해 '해녀회'를 만드는 등 적극적인 대응책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분노한 해녀들은 조합의 횡포에 반발해 집단 투쟁에 나서기에 이른다.

1931년 12월 하도리 해녀들은 회의를 열어 대표자 3명과 대표위원 10명을 선출하고, 조합 측에 대한 요구조건을 작성했다. △일체의 지정판매 금지 △계약보증금 생산자 보관 △미성년·40세 이상 해녀조합비 면제 △투병중 해녀 조합비 면제 △조합재정 공개 △악덕상인 및 옹호 관리자 면직 등이 주된 요구였다.

당초 경찰의 훼방을 고려해 배를 타고 제주읍(현 제주시내)로 직접 요구조건을 전달키로 했으나, 심한 폭풍으로 배가 출항하지 못했고, 항쟁은 이듬해로 이어졌다. 

◇ 천 여명의 해녀들 日제주도사 포위...일제 억압 맞서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을 택해 하도리 해녀 300여명은 본격적인 시위에 돌입한다. 해녀조합의 부조리를 규탄하자 그에 공감하는 해녀들이 합세하면서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성난 해녀들의 쇄도는 하도리에서 세화리 장터까지 이어졌고, 구좌면사무소까지 다다랐다. 

주재소(일재 당시 경찰 최일선 기관) 경관대가 총칼로 무장해 시위를 해산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면사무소 지부장은 책임지고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해녀들은 곧바로 다음 장날인 1월 12일 다시 규합했다. 구좌면 뿐만 아니라 정의면(현 성산읍), 연평리(현 우도) 해녀들도 가세했다. 때마침 이날은 제주도사이자 해녀조합장인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 도사가 순시 차 구좌면을 통과하는 날이었다.

해녀항일운동 사건을 다룬 당시 언론 보도. 사진=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해녀항일운동 사건을 다룬 당시 언론 보도. 사진=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해녀항일운동 사건을 다룬 당시 언론 보도. 사진=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해녀항일운동 사건을 다룬 당시 언론 보도. 사진=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호미와 비창(전복 채취시 사용하는 갈고리 모양의 도구)을 쥔 600여명의 해녀들은 일시에 장터로 모여들어 제주도사의 차량을 막아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에서 시흥리 해녀들과 연평리 해녀들이 합류하며 제주도사를 포위했다.

결국 시위에 굴복한 제주도사는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5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고, 해녀들도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더욱 강력히 항쟁할 것을 결의하고 해산했다.

이에 대한 일제의 응답은 '강제탄압'이었다. 1월 23일 돌연 배후세력으로 일컬어진 하도리 오문규, 종달리 한향택과 한원택, 세화리 문도배와 문도후 등이 연행된 것이다.

격분한 해녀들은 검속자를 탈환하기 위해 세화 주재소로 몰려들었다. 급보를 접한 본서에서는 무장경관을 현장에 출동시켰고, 그 결과 해녀 34명을 포함한 50여명이 다시 검속됐다. 27일에는 종달리 해녀 100여명이 검거된 이들을 석방하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검속된 해녀들만 100여명에 이르렀다. 

이중 주동자로 낙인 찍힌 해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은 옥살이를 하게 된다.

◇ 1만7000여명 참여한 여성항일운동...정당한 예우는 '먼 길'

해녀조합의 횡포에 저항해 전개됐던 해녀항일운동은 연인원 1만7000여명이 참여한 제주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생존권 투쟁이면서 한국 여성항일운동을 대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역사적 의미와는 달리 그간 해녀항일운동은 주목받지 못했고,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강창협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 위원장은 [제주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들어 해녀문화유산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면서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해녀는 물론 해녀항일운동 역시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들도, 도민들도 관심이 없었고 정부에서도 관심이 없었다"고 그간의 고충을 토로했다.

강창협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제주의소리
강창협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제주의소리
해녀항일운동의 주역들이 옥고를 치른 당시의 수형인명부. 사진=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해녀항일운동의 주역들이 옥고를 치른 당시의 수형인명부. 사진=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1차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난 1월 12일을 기려 매해 해녀항일운동탑에서 추모제를 지낸 것이 올해로 25번째지만, 이를 알고 있는 이들이 극히 드물다는게 강 위원장의 전언이다. 변변한 지원 없이 제주동녘도서관에서 열려 온 해녀항일운동기념식 역시 외면돼 오기는 마찬가지였다.

강 위원장은 "해녀항일운동은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재조명해서 후대들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겠나.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그나마 최근 제주도정이 여러 도움을 주면서 흉상 제작 등의 성과를 거뒀다. 정부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관심을 갖고 협조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당한 예우 역시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다. 해방 이후의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공적이 인정되지 않은 이들이 대다수다. 

심지어 문 대통령이 언급한 5명의 해녀들 중 애국지사에 선정된 이는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 3명 뿐이다. 옥고를 치르지 않은 고차동, 김계석은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부덕량 열사의 유족인 부성주(77)씨는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훌륭한 선조들의 행동들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며 "고모님과 함께 했던 고차동·김계석 애국지사 등의 공적이 뒤늦게라도 반드시 인정받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난 구좌읍 세화 오일장터에 세워진 비석. ⓒ제주의소리
제주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난 구좌읍 세화 오일장터에 세워진 비석.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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