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어머니는 제주4.3 광풍이 한창 몰아치던 1949년 5월14일 유복자로 태어나셨다.

제주4.3에 대한 본격적인 진압명령이 떨어진 1948년 11월, 그 해 음력 11월5일 제주도 남원면 태흥리에 사시던 저의 외할아버지께서 “나무하러 가야한다”는 경찰의 소집명령을 받고 행방불명 되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외할아버지께서는 당시 국군 제2연대 1대대 6중대 주둔지였던 서귀포초등학교 인근 정방폭포에서 군인과 경찰의 고문과 구타로 학살 당하셨다.

경찰의 소집명령으로 나무하러 산으로 올라갔다가 빨갱이 취급을 받아 체포된 후 주검이 되신 것이다.

행방불명된 외할아버지를 기다리시면서 제 어머니를 낳으시고 홀로 키우시던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호적에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남편도 없이 홀로 딸을 낳은 외할머니는 제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작은 외할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지 2년이 지나서야 1951년 5월 14일생으로 호적정리를 하셨다.

해녀였던 외할머니는 제 어머니께서 네 살 되시던 해에 경상북도 감포로 물질을 위해 제주를 떠나셨다. 외할머니가 육지로 물질을 하기 위해 떠나신 후 어머니는 제 외증조모 품에서 유년을 보내셨다.

통한의 세월은 다시 가족에게 이별을 알려왔다. 외할머니는 제 어머니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재가를 하셨다.

4.3 광풍에 남편을 잃고 홀로 딸을 낳았지만 그 딸을 남편 동생의 호적에 올릴 수밖에 없었고, 다시 재가하면서 피붙이 딸과는 생이별을 맞게 된 셈이다.  

그런 저의 어머니. 참 한(恨) 많은 삶을 살아오셨다. 4.3에 아버지도 없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태어나자마자 생모와 생이별을 해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4.3의 광풍 속에 이런 사례가 어디 우리 가족사뿐이랴 만, 국가공권력의 무자비한 학살로 빚어진 이런 일에 대해 국가와 지방정부가 최소한 책임 있는, 그리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해줘야 할 것이다.    

희망한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제주4.3으로 인해 행방불명됐다 숨진 외할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지만 제주4.3 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는 아들 된 도리로서 제 어머니가 4.3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숱하게 4.3평화재단이나 4.3유족회 측에 해법을 건의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늘 변함이 없다. 제 어머니의 호적은 작은 외할아버지 밑으로 되어 있어 친부인 외할아버지가 4.3희생자이긴 하나 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을 순 없다는 것이었다.

4.3희생자 유족이 유족임을 인정해달라고 하는데, ‘호적상’ ‘법률상’이라는 이유로 희생자유족이라는 진실을 외면하고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관계기관·단체의 태도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내기 힘들 정도다.

과연 ‘호적상’ 또는 ‘법률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법도 호적도 필요한 것이지 법과 호적을 위해서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난 십 수 년을 어김없이 4.3추념일에 어머니를 모시고 4.3평화공원을 참배하는 제 어머니와 제 가슴이 찢어진다. 그런 제 어머니를 아내로 인연 맺은 저의 아버지도 부인의 한을 풀어주려 평생 동분서주 하셨지만 끝내 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런 제 어머니와 같은 사연으로 평생 한을 품고 4.3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숱한 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고 어찌 제주4.3의 전국화, 세계화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제 외할아버지 4.3희생자 비석에 떳떳이 제 어머니의 이름을 올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71주년을 맞은 제주4.3 추념식의 주제가 ‘미래 세대 전승의 기회’란다. 칠십 평생을 4.3으로 한맺힌 삶을 살아오신 저의 어머니와 같은 진짜 4.3희생자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 어떻게 4.3이 미래로 나아가고 전승될 수 있겠는가. 4.3은 반드시 미래로 나아가고 전승돼야 한다. / 변민철(50, 제주시 도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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