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4.3희생자와 유족은 ‘빨갱이’와 ‘빨갱이 새끼’...친일파 반대해도 빨갱이  

# 빨갱이와 빨치산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중에서

과거 4.3희생자는 ‘빨갱이’, 그 유족은 ‘빨갱이 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도대체 빨갱이가 무엇이기에 제주4.3이 빨갱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나의 고교시절, 머리가 좋은 학생들은 서울대와 사관학교를 주로 지원했는데, 사관학교 지원생들 대부분이 사상검증에서 걸려들어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로 4.3이라는 굴레 때문이었다.

빨갱이란 단어의 어원은 일본강점기 시절 항일무장유격대를 지칭한 ‘파르티잔(빨치산)’에서 유래되었다. 유격대원을 뜻하는 ‘파르티잔(partisan)’과 공산주의를 뜻하는 ‘빨강’에서 연유되었다. 파르티잔의 러시아 발음이 우리말로 빠르지잔→ 빨치잔→빨치산으로 변형되다 빨강이란 말과 결합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유격대의 현대적 의미는 '게릴라(guerrilla)'이다. 프랑스어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파르티잔이 빨치산으로 변형됐고, 최종적으로 빨갱이가 되었다. 파르티잔은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말한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빨간색 혹은 적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빨갱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비롯되었다.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나중에는 공산주의자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한국전쟁 중 인민재판 장면.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해방 뒤 남한의 빨치산은 194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친일경찰의 악행과 각종 사회문제 때문에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은 전국을 휩쓸었다. 항쟁을 진압한 뒤 미군과 경찰은 항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을 체포·구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본격적인 빨치산의 시작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에 맞선 제주4.3항쟁에서부터였다. 

4.3항쟁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무산시켰고, 이에 대해 미군정은 초토화전술을 대표하는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내륙의 빨치산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2달여 만에 발생한 여순사건에서 본격화 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에 휴전이 되었음에도 1955년까지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이 남부군의 이름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과 반공을 국시로 했던 박정희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한민국에서는 좌익 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빨갱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 일제의 ‘아카’는 독립운동가   

“1940년대의 남부 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찬,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 소설가 채만식의 <도야지>, 창비사 《문장》 27호, 194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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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관련 기사를 보도한 일본의 한 신문.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빨치산은 일제시기부터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 말기 징병·징용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갔던 젊은이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적은 규모이며 조직적인 것도 아니었다. 국외에서는 보다 더 조직적이며 많은 규모의 항일빨치산이 만들어졌다. 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으로 불린 세력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였고, 때로는 국내 진공작전까지 시도하였다.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匪賊)’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한반도에서 빨갱이의 어원은 일경(日警)에 그 뿌리를 두었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가를 가두고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체포자 명부의 독립운동가들 이름에 빨간 점을 찍어 놓고 ‘아카’라고 불렀다. ‘아카(あか)’는 빨갛다는 의미이며 빨갱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매도한 최초의 단어였던 셈이다.   

빨갱이라는 단어 자체의 빨간색을 뜻하는 아카는 원래 공산주의자들의 상징이 빨간색(적색)이라서 일본에서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당시 일본 경찰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일종의 정치범수용소와 비슷한 곳에 가둬넣고 사상전향 교육을 시켰는데, 이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명부에 빨간 점을 찍어 놓고 아카라고 불렀다.

일제가 1932년 일본 관동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괴뢰정권 만주국을 건국한 후 게릴라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하여 낮은 단계의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로는소련 공산당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어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것이 일제하의 빨치산 역사다.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빨갱이들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에서 못살고 못 배우다 보니 파르티잔이라는 외국어를 발음하기가 어려워서 빨치산이란 우리나라식 이름으로 변형이 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서양 문물이 처음 들어올 때 베토벤을 ‘배도빈’이라 부르고 차이코프스키를 ‘차갑석’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일과 유사하다.

아카와 빨갱이는 둘 다 사람의 속성을 ‘빨강(赤)’이라는 색깔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그 의미가 일차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지칭하는 것이다. 아카는 포섭의 대상이거나 ‘배재한 채 포섭’하는 대상이었다.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색깔 빨강 혹은 적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빨갱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나왔다. 당시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나중에는 공산주의자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 양정철의 《세상을 바꾸는 언어》중에서.

# 해방 직후의 ‘빨갱이’ 용법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빨갱이’란 말이 유행이다. 이는 공산당을 말하는 것인데 수박같이 겉은 퍼렇고 속이 빨긴 놈이 있고 수밀도 모양으로 겉도 희고 속도 흰데 씨만 빨간 놈이 있고 토마토나 고추 모양으로 안팎이 다 빨간 놈도 있다. 어느 것이 진짜 빨간 놈인지는 몰라도 토마토나 고추 같은 빨갱이는 소아병자일 것이요, 수박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붉은 것은 기회주일자일 것이요, 진짜 빨갱이는 수밀도같이 겉과 속이 다 희어도 속 알맹이가 빨간자일 것이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 규정짓는 그 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 자들이 민족 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 <독립신보>, 1947년 9월 12일

빨갱이의 탄생은 1946년 반탁(反託)과 찬탁(贊託)이 대립할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한국에는 반탁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런데 전날 저녁까지 반탁을 주장하던 공산주의자들이 1946년 1월 2일 아침부터 돌연 신탁통치 찬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소련의 지령을 받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의 백성들에게는 못 믿을 좌익, 상종 못할 좌익, 민족반역의 좌익이라는 이미지가 탄생하였고, 그에 조롱으로 ‘빨갱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 10월 공산당에 의한 대구 폭동이 발발하여 남한에 혼란과 유혈이 몰아치면서 ‘빨갱이’라는 용어는 고착되었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우익청년단체들의 문제점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7년 6월 9일자 신문. ‘남조선 테로 진상’이란 제목 아래 ‘주모 단체는 해산을 명령…협박·공갈·금품강요는 엄벌’이라는 부제도 보인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해방 후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을 공산당 동조자라며 빨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친일 군경이었던 김종원과 노덕술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심하게 고문했고,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인 김원봉(金元鳳) 투사를 체포하여 ‘빨갱이 두목’이라고 모욕하며 뺨을 때렸다. 

실제 상징 언어로 ‘빨갱이’가 대두한 것은 해방정국, 이승만의 등장부터다. ‘빨갱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 반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씌우는 주술로 쓰였다. 친일파 청산을 거론해도, 외세 배격을 주장해도 ‘빨갱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탄압받고 죽임을 당했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고 규정짓는 그 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 자들이 민족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 <독립신보>, 1947년 9월 12일

그래서 ‘이 자들’에게는 백범 김구도 빨갱이가 되었다. 

“이승만은 국민을 좌와 우로 나누어 비국민을 제거 대상으로 보고 각종 단체와 민주인사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정치보복과 학살을 자행했다.”
-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중에서 
 
빨갱이란 말이 정치적 반대파를 공격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1947년 4월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자국에 보낸 문서에는 빨갱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4월 27일 이승만 환영 집회에서도 ‘빨갱이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나왔다. 

그러니까 빨갱이가 '공산주의자'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은 1947년 무렵이며 1948년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4.3사건과 여순사건을 계기로 '빨갱이 프레임'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이전 빨갱이는 '공산주의자'와 다소 다른 의미를 지녔다.

1947년 4월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자국에 보낸 문서에 “4월 27일 이승만 환영 집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박멸하라', '빨갱이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나왔다”라고 명시됐고, 1947년 9월 12일 자 <독립신보>에 “빨갱이라는 말이 퍽 유행된다. 이것은 공산당을 말하는 것...”이라고 적히면서 빨갱이에 대한 의미 변화가 있음을 말해준다.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 이것이 남한의 현재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높은 교육수준을 가진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들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하였지만 이러한 오명은 곧 사라질 것이다. 이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으며 가장 큰 그룹이 한민당이다." 
- 미군정 정치 고문 베닝호프(H.M.benning-hoff)의 초기 보고서 중에서.

# 제주4.3과 빨갱이 

“무엇을 보았는가/ 빨갱이 제주민중은 경계하라고/ 관덕정 허공에 걸려놓은 모가지야/ 볼 수 없는 눈동자야/ 무엇을 보았는가/ 공포의 그림자 짙게 드리우는 그들의 눈망울을/ 메마른 땅위에 스미는 너의 핏방울을/ 보았는가/ 가슴팍 주머니에 달랑 꽂혀 있는 숟가락아/ 무엇을 꿈꾸는가”
- 김규중의 시 <이덕구> 전문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1947년 3월 1일, 3.1절을 기념하는 민중 집회에 미군정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였다.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 민중은 '비국민'인 빨갱이로 취급되어 초법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제주 민중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온몸으로 항거했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이런 제주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1948년 5.10 총선거 치르고 1년 뒤에 재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제주섬은 ‘붉은 섬(Red island)’으로 낙인 찍혔다. 이승만과 미군정의 지배 권력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색으로 칠하여, 붉은 섬 혹은 ‘RED ISLAND’라고 명명했다. 당시에 그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수많은 양민들이 붉은 색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갔다. 그 대량학살을 ‘레드 헌트’(RED HUNT)라고 불렀다. 레드 헌트는 문자 그대로의 ‘빨갱이 사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중세의 ‘마녀 사냥’(WITCH HUNT)에 빗대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이 자행한 학살은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우슈비츠보다 훨씬 더 잔인한 학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반공주의를 이용한 빨갱이 몰이는 공고해져 갔다. 1948년 11월 섬의 중산간 지대 130여 개 마을들이 초토화 불길에 싸였다. 그 붉은 빛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섬주민의 1/9에 해당하는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되었다. 4.3은 종전 후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엄청난 학살사건에서, 미국은 손에 피가 묻지 않았다고 해서 무죄인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만 가지고 봉기한 젊은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무고한 양민 최소 3만 명을 소탕한 것이 바로 4.3사건이다. 양민 100을 죽이면 그 중에 게릴라 한 명쯤은 끼어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게릴라 200명을 죽이기 위해서 양민 3만을 소탕했다. 

4.3의 대참사는 빨갱이는 아예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무서운 야만주의가 저지른 사건이었다. 빨갱이는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아예 사람이 아니었거나, 하등 인간 즉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미국은 하와이왕국 침략 행위를 사과했듯이, 몇 년 전에 인디안 학살행위에 대해 사과했듯이, 4.3 참사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4.3에 책임져야 할 구체적 근거는 무엇일까? 1947년 3.1절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인명 살상이고 이에 항의하는 제주 도민에 대한 무차별 연행 등 대탄압이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 이후 평화적 해결의 길을 거부하고 무력충돌의 격화와 대규모 희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강경진압정책 선택이다. 5.10 단독선거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 선거 무산 이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파견된 브라운 대령의 강경진압 작전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무차별 대량학살을 제어하기는커녕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학살을 부추긴 사실 등이다.

미국은 4.3 학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 도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 정부 및 시민사회와 함께 4.3에 대한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또한 미국은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4.3에 대한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에 상응하는 피해회복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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