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67. 그것은 자존의식, 순응의식, 반골정신이다

# 제주도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 하나의 독립국가, 탐라국이었다.

고려 숙종 10년(서기 1105년) 탐라국호를 폐지하여 탐라군으로 개칭할 때까지 제주도는 중국, 일본, 한반도(신라·백제·고구려)와 교류하면서 아시아를 무대로 해상 무역 활동을 전개하던 해양국가였다.

제주도가 고려에 복속된 것은 메이지시대(1868~1912) 초기 일본 본토에 복속된 오키나와(류큐왕국)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래서 오키나와 원주민을 보면 나는 동병상련을 느낀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제주도가 지금까지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면 싱가포르(면적이 제주도의 절반이다)처럼 세계의 일등국가가 됐을지 모른다.

# 제주도는 1급의 정치범 수용소였다.

제주도가 난신적자들의 유배지가 된 것은 한반도에서 격절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유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조선조까지 제주도는 ‘천 년의 유배지’였다. 그동안 수 천, 수 만의 유배인들이 눈물과 한숨으로 통한과 울분의 세월을 보낸 곳이 바로 이 저주받은 섬이었다.

왕(광해군)이나 세도가(태종의 처남, 세종의 외삼촌인 민무구·민무질 형제), 당대의 대정치가·석학들이 권력 투쟁과 사색 당쟁의 여파로 이 척박한 섬에 귀향을 왔다. 제주도 사립 명문고인 오현고등학교의 정신적 지주인 오현(五賢 : 우암 송시열,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이 대표적인 유배객이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이 섬에서 탄생하 명작이다.

아마도 최후의 유배인은 구한말, 병조판서와 외무대신을 역임한 운양 김윤식이 아닐까 한다. 운양은 제주 유배기간(1897~1901)의 일기인 <속음청사>란 명저를 남겼다. (번역: 김익수, 제주문화원)

# 제주인 유전자에는 유배인 기질이 있다.

제주인은 원주민인 고·양·부 3성(姓)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배인의 자손이거나 육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출륙금지령(1629년)이 내려지고 100년 넘게 섬에 갇혀 있었던 제주인들 모두가 사실은 유배인이었다. 

유배인 기질의 키워드는 ①자존의식 ②순응주의 ③반골정신이다. 

첫째, 자존의식이다. 유배인들은 지금은 비록 적객 신세이나 한 때 조정 충신으로서 한 나라의 권력을 쥐락펴락 했던 인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다. (날 함부로 깔보지 말라!)

둘째, 순응주의이다. 조천의 ‘연북정’은 순응주의의 상징이다. 연북정에서 북향배례하면서 비굴한 아첨으로 겉으론 순응하는 척 했지만 마음 속에선 와신상담, 권토중래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죽은 듯이 엎드려서 소나기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자!)

제주 사람들이 자주 쓰는 사투리에 ‘놈의 대동’(남을 따라 하는 비주체적 행위)이 있는데, 이는 수많은 외침(몽고, 왜구, 육지것들에 의한)과 내분(민란, 4.3사건 등 도민끼리의 충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자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눈물 겨운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2013년 이강회의 '탐라직방설'을 현행복(현 제주문화예술진흥원장)이 옮겨 펴낸 '탐라직방설 - 19세기 제주 양제해 모변사의 새로운 해석'이다. 표지 속 캐릭터는 1813년 초겨울 봉기를 일으킨 양제해. ⓒ제주의소리
사진은 2013년 이강회의 '탐라직방설'을 현행복(현 제주문화예술진흥원장)이 옮겨 펴낸 '탐라직방설-19세기 제주 양제해 모변사의 새로운 해석'이다. 표지 속 캐릭터는 1813년 토호관리들의 착취에 못이겨 초겨울 봉기를 일으킨 양제해. ⓒ제주의소리

또한 이것은 지리학자 송성대가 제주정신이라고 내세운 해민정신(海民精神)의 요체가 되는 ‘대동주의’와도 일맥 상통하는 사고방식이요, 행동양식이다.

셋째, 반골정신이다. 순응하면서도 제주인의 내면 속에는 집권자나 조정(정부)에 대한 반감, 적대의식이 뿌리 내리고 있었고, 이것이 조선조의 민란(방성칠, 이재수의 난 등)과  일제 시의 세화리 해녀 항쟁 사건, 해방 후의 4.3사건 등으로 표출된다. 2019년 현재까지도 찬·반의 시각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 강정 해군기지나 성산읍 제2공항 반대 운동도 이 같은 반골정신의 발로로 해석할 수 있다.

# 제주인 대다수가 고려·조선조의 대정치가·석학의 후손이다.

제주인 중에 인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역대 정부들도 제주인을 장관이나 청와대의 요직으로 기용해온 사례가 많다. 물론 현 정부에선 홀대를 받는다는 지적도 있다. 제주인은 그렇게 녹록한 사람들이 아니다. 순응주의라는 외피 속에 감추어진 반골정신이 언제 어디서 터져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대통령이 귀 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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