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인간] 21. 한강에게(To My River), 박근영, 2019.

영화 '한강에게'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한강에게'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시가 슬픔을 위로할 수도 있지만 시로 위로가 되지 않는 슬픔도 있다. 모든 이야기가 노래로 불러질 수도 있지만 멀리 가지 못하는 노래들이 더 많다. 시와 노래는 해질녘 강처럼 흘러간다. 한강을 처음 봤을 때 그 크기에 놀랐다. 강, 기차가 없는 지역에서 태어난 나는 강이나 기차의 정서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뭍에 가면 강가에 가거나 기차를 타는 걸 좋아한다. 대전에서 살 때는 기적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기찻길 근처 동네로 이사한 적도 있었다. 차단기가 내려진 건널목에서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어떤 아픔이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멍하니.

대전에 있을 때 시 동인에 가입한 적이 있다. 차령시맥. 차령산맥에서 ‘산’을 ‘시’로 바꾼 이름이었다. 그때 한 번은 대청호가 보이는 어느 찻집에 가서 합평회를 했다. 시간이 금강으로 흘러가던 시절이었다. 그때 누군가 금강 연작시를 쓴다고 했다. 나중에 우연히 본 한 시인은 강경이 고향이었는데 역시 금강 연작시를 썼다. 시간이 흘러 제주로 돌아와 시를 쓰는 나는 내가 본 남해에 대한 연작시를 써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흘러가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강이나 바다는 시의 이미지와 많이 닮았다. 그러고 보니 기차도 버스도 바람도 흘러간다.

4월 16일. 5년이 흘렀다. 하지만 4월 16일은 다시 돌아왔다. 이 비극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와 노래가 모든 슬픔을 위로할 수 없다. 어떤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남는다. 차령시맥에서 만난 한 동인은 청주에서 화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금강이 보이는 벤치에 그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에 햇빛이 강물에 내려앉아 흐르고 있었다. 그때 정확한 말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턱수염이 더부룩한 그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우리가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저 강물이 시를 쓰고 있지 않나.”

현택훈
고등학생 때 비디오를 빌려보며 결석을 자주 했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처음 쓴 소설 제목이 ‘중경삼림의 밤’이었다. 조조나 심야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영화를 소재로 한 시를 몇 편 썼으나 영화 보는 것보다 흥미롭지 않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 좀비 영화에 빠져 지내다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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