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본래 자리를 지키는 모든 것이 '자연'

친구들과 비자림을 걸어보기로 했다. 계절의 여왕 오월의 첫째 주 토요일, 바람과 햇볕의 비율이 황금률이라 산책하기 딱 좋았다. 가벼운 옷차림에 즐거운 마음을 담아 산책로로 들어서는 순간 작은 문제가 생겼다. 도민 무료인데 우리는 아무도 신분증을 갖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완벽한 사투리 구사가 신분증보다 더 확실한 것 아니냐며 떼를 써볼까 하다가 그냥 입장료를 냈다. 나들이 할 때는 무조건 신분증을 챙기자는 소중한 교훈을 되새기며 비자림으로 들어섰다.

삶에 도움이 되는 교훈까지 알뜰하게 챙긴 우리는 더욱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자림 산책을 시작했다. 들어서자마자 울울창창한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비자림이라고 해서 비자나무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에는 내가 미처 이름을 다 알지 못하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돌덩이 사이를 비집고, 오래된 나무의 드러난 뿌리를 타고 올라 싱싱하게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자곶의 생명력’이라는 안내판은 그 경이로운 모습에 대해 “식물이 살아갈 수 없는 바위 돌 틈에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저 모습을 보면 우리들 마음이 엄숙해진다”고 친절하게 설명하며 “비자곶의 생명력을 보면서 생명의 기를 듬뿍 받아가라”고 덕담을 해 주었다. 

천년 세월을 살아온 거목들 앞에서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비자나무 열매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며 웃고 떠드는 사이에 비자림 산책은 막바지로 치달아 어린 시절 흔히 볼 수 있었던 나지막한 돌담을 지나게 되었다. 짧은 그 돌담길을 돌아가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이 모든 것이 자연(自然)이구나. 우리가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건 말건 여기 나무와 돌과 공기와 흙과 바람과 햇볕과 물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거구나. 자연스럽게.  

(자연: 1.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 2.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생겨난 산, 강, 바다, 식물, 동물 따위의 존재. /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비자림에서는 이렇게 멋진 나무들을 쉽게, 많이 볼 수 있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비자림에서는 이렇게 멋진 나무들을 쉽게, 많이 볼 수 있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그래서 나는 엄숙하게 생명의 기를 받아들이는 대신 자연스럽게 자연을 보며 비자림 산책을 마무리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무 몇 그루를 캤다. ‘비자림로 숲, 어린 나무 구출 작전’이라는 문자를 받은 친구 하나가 비자림로 확장 공사 현장의 어린 나무를 캐자고 제안한 것이다. 준비성이 똑같이 없는 우리는 달랑 작은 모종삽 하나와 비닐 두 장 들고 벌목 현장으로 들어갔다. 삼나무는 베어져 밑동만 남았지만 크리스마스선인장, 보스턴고사리, 월계수, 천남성, 바질(스마트폰 검색 도움) 등등이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었다. 부족한 준비물은 평소처럼 몸으로 때우기로 한 우리는 흙 범벅 손이 가시에 긁히고 뒤로 벌러덩 넘어지기도 하며 몇 그루를 캐 우리 집에 모셔왔다.

내 딴에는 정성스럽게 모신다고 하지만 걱정은 된다. 애써 모셔온 이 친구들이 왜 나를 여기로 데려 왔어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둬야지라고 말하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http://jejuboo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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