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특집-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⑥ 송석진 할아버지 고향 등지고 남은 여생 일본서
일본군 강제징집-4.3 빨갱이 누명 옥살이-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많은 비운의 삶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군법회의를 통해 민간인들이 전국의 교도소로 끌려갔다. 수형인명부로 확인된 인원만 2530명에 이른다. 생존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재심 청구에 나서면서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사법부가 군법회의의 부당성을 인정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제주의소리]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국·해외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생존수형인을 만나 당시 처참했던 4.3의 실상을 전한다. [편집자주]

송석진(93.동경시 거주) 할아버지가 고향 땅에 남겨 두고 온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해준게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주의소리
일본 도쿄 자택에서 만난 송석진(93) 할아버지가 4.3 당시 기억의 파편을 끄집어 내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나는 질문에 "4.3이 있으니까"라는 명료하고 단호한 답을 들려줬다.  ⓒ제주의소리

70여년 전 불어닥친 핏빛 광풍으로 인해 그는 하루 아침에 고국도, 고향도 잃었다. 쫓기듯 달아나 몸을 의탁한 이국 땅은 이제 그에게 있어 모국보다 친숙한 곳이었다. 적어도 영문도 모른 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억울함은 없었을 터였다.

일본 도쿄의 빽빽한 빌딩 숲을 해치고 다다른 작은 공동주택에서 4.3생존수형인 송석진(93) 할아버지를 만났다.

인터뷰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4.3 도민연대)가 재심에 앞서 증언을 발굴하는 과정에 동행하면서 이뤄졌다. 인터뷰는 일본 4.3운동의 주역인 문경수 리츠메이칸대학교 명예교수의 도움을 받아 약 한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느지막한 저녁 시간,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송 할아버지에게서는 모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제 한국말 잘 모른다"며 손사래를 쳤던 송 할아버지는 애써 잊으려 했던 고향의 언어가 들려오자 한 두 마디씩 입을 떼기 시작했다.

'망각의 병'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는 송 할아버지는 힘겹게 기억의 파편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 너머에서도 70여년 전의 한(恨)은 깊게 각인된 듯 했다. 특히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기억은 그 어느 것보다 선명하고 뚜렷했다.

◇ "버스기사 일하던 중 갑자기 잡혀가...왜 감옥 갔는지도 몰라"

조각 난 기억들과 자녀들의 증언, 드물게 남아있는 그의 이전 발언 기록 등을 토대로 송 할아버지의 삶을 되돌아봤다.

제주 협재리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난 송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당시 제주와 일본을 잇는 여객선인 군대환(君代丸)의 선원으로 일한 아버지의 덕으로 나름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 3형제의 이름은 단박에 꺼낼만큼 기억은 생생했다.

고향에서 소학교 4학년까지 마친 송 할아버지는 이후 일제에 강제징집돼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일본 도쿄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송석진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일본 도쿄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송석진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군 복무를 마치고 제주에 돌아와서는 가까운 친척이 당시 버스회사 사장으로 있던 제주시에서 버스 운전을 했다. 이 맘때쯤 결혼을 해 슬하에 2남 1녀를 두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제주 전역에 몰아친 4.3의 광기에서 송 할아버지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출근 직전 집에서 쉬고있던 송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잡혀가 불법 군사재판을 받았다.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왜 잡혀갔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조그만 실마리조차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다.

문=4.3사건 들어봐수과? 삼춘 4.3 사건 때 몇살?
답=4.3때 죄도 없는데 잡혀서 형무소 갔다왔지. 

문=어디에서 잡혔수과?
답=아무데도 안갔는데도 그렇게 잡아갔지.

문=누가 와서 잡아간 마씨?
답= 경찰관들.

문=뭐라고 하면서 잡아간 마씨?
답=국가? 국방법 위반?

문=그 말이 이해가 되수과?
답=위반이고 뭐고 나는 아무말 못하는데 그냥 잡아갔어.

송 할아버지에게는 '관덕정 쪽의 경찰서에 잡혀있다가 배를 타고 목포형무소로 갔다'는 기억만 남아있었다.

목포로 가는 짐을 싣는 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겨탔다고 기억을 떠올렸지만, 제대로 된 재판이 이뤄졌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되살리지 못했다.

문=재판이라는 것은 재판장도 있어야하고 변호사도 있어야 하고 검사도 있어야 하잖아 예?
답=아니. 없었어.

문=형무소에 간다고 말 들었을 때 어떵헙디가?
답=무서웠어. 무서워서...

◇ 옥살이 후 고향 등져...부산→일본 의탁해 허드렛일 감내

수형인 명부에는 송 할아버지가 내란죄 혐의로 1948년 12월, 목포형무소에서 1년간의 옥살이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공교롭게도 송 할아버지의 당시 형무소에 대한 기억은 그가 75세였던 2001년에 조사된 과거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에 대한 증언록에 남겨져 있다.

"여름이었다. 총소리가 나고 야단이 났다. 우리는 뭣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있어서 간수들이 죽었다고 했다......(중략) 우리는 제주 출신끼리 모아놓았다. 몇 개월 후에야 감방에 들여놓는데 잡범이라고 불리는 강도, 살인범들하고 같이 있었다. 우리는 그 잡범들 도움을 많이 받았다. 탈옥사건이 있은 후, 그 사람들이 증인을 서 주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제주도 출신들은 무조건 잡아다 죽였는데, 잡범들이 내 보증을 서 줬다."

송석진(93.동경시 거주) 할아버지가 고향 땅에 남겨 두고 온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해준게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주의소리
송석진(93.동경시 거주) 할아버지가 고향 땅에 남겨 두고 온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해준게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주의소리

 

일본 도쿄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송석진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일본 도쿄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송석진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인터뷰 중에도 형무소 생활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떠올렸다. 한 방에서 5~6명이 생활했고, 주먹밥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것, 가을에 잡혀갔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겨울이 되면 추위에 떨어야 했던 사실들을 기억해 냈다.

옥살이 후, 송 할아버지는 제주시로 잠시 돌아왔다가 곧바로 한국전쟁에 자원해 해병대로 입대했다. 쫓기듯 선택이 강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인천상륙작전 당시 송 할아버지도 현장에 있던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5년여 간의 군 생활 후에는 제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문=군 생활 후에는 어디로 간 마씨?
답=부산.

문=무사 제주도로 안가수과?
답=두 번 다시 가고싶지 않았지.

문=왜 가고싶지 않았수과?
답=4.3사건이 있었으니까.

문=그럴 때마다 고향 생각은 안나수과?
답=고향 생각 났지..... 갈 생각은 안 들었어.

왜 제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송 할아버지의 답변은 짧고 단호했다. 제주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가고싶지 않았다고.

이후 송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뱃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넘어가기에 이른다. 일본에서는 상점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바지선에서 하역 작업을 하는 등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공포보다, 천대 받더라도 일본에서의 삶이 차라리 나았던 것일까.  

일본에서 새 가정을 꾸린 송 할아버지는 특히 제주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해 "자식한테 해준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한 맺힌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 "자식에 누가 될까봐..." 고령 감안하면 재심 마지막 기회

송 할아버지는 4.3수형희생자 불법 재판 2차 재심청구 소송에 나설지 여부를 고심하고 있다. 지난 1월 17일 이뤄진 1차 재심에서 법원은 송 할아버지와 같은 불법 재판의 위법성을 인정한 바 있다.

고령인 송 할아버지의 건강상태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번 2차 재심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도쿄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송석진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일본 도쿄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송석진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재심 청구는 제주에 거주하는 송 할아버지의 큰아들의 의중이 반영됐다. 1심 재판의 승소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아픈 과거를 치유하고 싶다며 4.3도민연대에 연락해 와 연이 닿게 됐다.

다만 송 할아버지는 은연중에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자녀들에게 누가 될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송 할아버지의 불안을 위로하고 본인의 의사에 의한 정상적인 재심 절차 참겨가 이뤄질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문=삼춘 이제 무죄 만들어 드리려고 찾아온거 마씸.
답=아휴, 뭐 할 필요 없고, 다시 (제주로) 갈 필요도 없으니까.

문=무사 할 필요가 었수과?
답=거길 뭐하러 간다고. 그건 무리야.

문=1차 재심때는 99세 할머니도 했수게. 삼춘은 지금 93세면 한참 젊으셨는데 재판 이겨서 무죄 받을 수 이서마씸.
답=그거 해봐도 할 수 없는거. 

문=그 할머니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한민국에서 무죄라고 결정 해줬수다.
답=아휴. 그걸 하게되면 아이들(자식들)이 불쌍하니까.

문=아이들이 불쌍한게 아니고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있는거우다.
답=아니......

문=할아버지 18명이 재판에서 이겼수다. 죄없이 잡혀간거 이견 마씨. 이겨서 보상금도 나올거고, 기록도 없어지고, 명예가 회복되는거난 예. 저희가 삼춘 도와드릴거니까 마음의 준비 하고 계십서 예?
답=네, 네네.

문=다시 한번 올 수도 있고. 제주도 오였을때도 뵐게 예.
답=감사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송 할아버지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두렵게 만들었을까. 한국전쟁 참전 후 '왜 제주도로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제주에는 4.3이 있으니까'라고 한 대답이 그 답은 아닐까.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에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됐고,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빨갱이'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또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피를 흘렸던 그다.

고국과 고향을 등지고 일본에서의 한 많은 삶은 이제 구순을 넘긴 말년에 찾아온 치매와 싸우고 있다. 국가가 더 늦기전에 송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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