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공동체 다움 연극 ‘그리움이 글이네’

한적한 중산간 마을,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곡선을 그리는 돌담과 그 뒤로 펼쳐진 농지, ‘점빵’이라고 적힌 가게의 풍경과 나무 쉼터까지 더해 한눈에 봐도 ‘농촌’이다. 

그래서 일까. 소극장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가 5월 19일 문을 열었다는 소식은 꽤나 낯설게 느껴진다. 제주시내에도 찾기 힘든 소극장이 중산간 마을에 있다니! 

그러나 직접 본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는 흔히 생각하는 소극장과 거리가 멀다. 극장 무대는 평범한 가정집 마당. 성인 남자 보폭으로 세 네 걸음이면 돌아볼 규모. 삼도2동 시절 예술공간 오이가 보유하던 ‘제주서 가장 작은 소극장’ 타이틀을 한 동안 지킬 수준으로 협소하다. 덕분에 창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무대가 되고, 처마 아래 무상(?) 입주한 제비들이 우는 소리, 하늘 비행기 소리, 집 앞 지나는 자동차 소리 모두 공연에 녹아든다.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의 안주인은 지난 1월부터 제주에서 활동을 시작한 극단 ‘연극공동체 다움’이다. 극단은 30대 연극인 서민우, 황은미를 중심으로 신다영까지 세 사람이 몸 담고 있다. 부산, 대구, 서울 등 모두 제주 출신은 아니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제주의소리
8일 연극공동체 다움의 연극 '그리움이 글이네'의 한 장면. ⓒ제주의소리

올해 1월, 놀라운 연기력을 뽐낸 창단 작품 <송이섬의 바람> 후 새로운 거점을 찾았고, 그 결과가 바로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다. 가정집을 극장으로 개조한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 탄생 과정에는 ‘제주를 기반으로 남는것과 모자라는 것을 연결하는 클라우드 소싱, 펀딩 플랫폼’ 제주스퀘어가 도왔다.

예상대로 이곳은 극장 겸 단원들의 거처다. 전자보다는 후자 비중이 커 보이지만, 이미 네 차례나 작품을 올린 엄연한 극장이기도 하다. 매월 둘째, 넷째 금요일과 토요일마다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에서의 첫 공연은 김선관이 쓴 <그리움이 글이네>다. 이 작품은 부산 극단 일터의 옴니버스 연극 <슴슴삼삼한 몇 가지 이야기> 세 가지 단편 중 하나다. 

이제야 한글학교를 졸업하고 글쓰기 익힌 할머니 세 명이 각자 쓴 글을 발표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하게 가슴 뭉클한 작품이다. 첫 번째 할머니는 ‘다시는 집에 오지 말아달라’는 며느리 말이 가슴에 남고, 두 번째 할머니는 제사 돈 적게 주는 아들이 섭섭하다. 세 번째 할머니는 마흔이 넘도록 결혼 소식이 없는 아들을 타박한다.

연극공동체 다움은 원작처럼 탈을 쓰고 경상도 사투리 대사를 읊는다. ‘몸빼’ 바지나 탈 위에 그린 노인 분장은 무대와는 사뭇 다르게 상당히 신경 썼다. 본래 경상도 사투리 작품인데다, 배우 세 명 가운데 두 명이 부산, 대구 출신이라 사투리 대사를 소화하는 능력은 타 지역 관객 입장에서 볼 때 특별히 흠잡을 데가 없다. 작은 손동작부터 구부정한 허리까지 노인을 묘사하기 위해 애쓴 노력도 역력하다.

이곳 무대가 정식 무대와는 워낙 차이가 나니 배우 연기에 힘이 없으면 관객 집중이 붕 뜨기 마련일 텐데, 창단 공연으로 실력 입증한 연기는 이번 <그리움이 글이네>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됐다. 글로 써보니 그리움이 더 커진다는 할머니들의 대사처럼, 20분 남짓 짧은 단편 작품은 늙어감의 애환을 잔잔히 여운으로 남긴다.

노년의 삶이 소재인 만큼 노인들이 많은 마을에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8일 공연은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네 할머니들도 ‘마실’ 분위기로 극장을 찾아 동년배로 변해 애쓴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공연을 보고 나니 올해 초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진행한 전시 <어쩌면 잊혀졌을 풍경>이 떠올랐다. 4.3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사연을 본인이 글로 그림으로 남겼다. 작업 과정은 예술가들이 함께 했다.

생전 처음 그려보는 그림과 글로 써보는 자신의 과거. 70년 전, 말로는 다 설명 못 할 기억이 담겨 있기에, 엉성할 수록 더욱 가슴을 울리는 기록이었다. 제주4.3판 <그리움이 글이네>가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다룰 소재는 모자람 없이 넘쳐날 정도라, 분명 그리움 이상의 한(恨)과 아픔, 서러움이 구구절절하게 묻어날 것이다.

황은미, 서민우 두 사람은 30대 나이지만 <오구>, <어머니>, <궁리>, <첫사랑이 돌아온다> 등 쟁쟁한 작품에서 내공을 쌓은 배우들이다. 이젠 봉성리에 터 잡고 자신들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문화 예술 지원 사업에 신청하고 다음 작품도 고민하면서 연극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 중이지만, 가끔 농사일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생계도 꾸려나가고 있다. 낯선 마을로 굴러온 처치라 열심히 인사하며 지내는 덕에, 이제는 “며느리 삼자”는 농담 섞인 말도 듣는다.

두 사람의 도전이 해피엔딩일지 배드엔딩일지는 알 수 없다. 연극으로 먹고 사는 게 불가능한 이 땅에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의 장난에 심히 좌절할 지도 모른다.

“제주가 좋아서 왔다. 내려와서 할 수 있는 게 연극이라 연극을 선택했다. 제주가 싫어지는 날이 오지 않는 이상 계속 살고 싶다.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는 심정이다.”

황은미는 8일 공연이 끝나고, 지나온 그리고 다가올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빼어난 실력을 갖춘 배우들이 제주를 찾아서, 그것도 외진 장소로 들어가기 까지는 스스로를 비우는 결심이 뒤따랐으리라 짐작해본다.

제주에서 가장 작은 극장, 성리 우스 어터, 일명 봉하씨. 그곳에서 써내려갈 이야기가 부디 행복하길 바란다. 

앞으로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는 게스트하우스 같은 숙소로 탈바꿈한다. 연극 관람 후 편안하게 대화 나누며 하루 묵는 방식을 선보인다는 구상이다. 연극공동체 다움은 매월 둘째 주, 넷째 주 금·토요일(19시)마다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에서 공연한다. 관련 정보는 페이스북 ‘연극공동체 다움’에서 확인 가능하다.

봉성리 하우스 씨어터
제주시 봉성로 67 (어도초등학교 인근)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