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36) 루이스 매넌드, 《메타피지컬 클럽》, 정주연 역, 민음사, 2001

루이스 매넌드, 《메타피지컬 클럽》, 정주연 역, 민음사, 2001. 출처=알라딘.

막말이 불러오는 피로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20세기 초에 미국 전역에 철도가 깔리고, 전신망이 확산되는 상황을 보면서 민주주의가 한층 발전할 수 있는 사회적인 가능성이 열렸다고 낙관했다. 민주주의란 공동체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사회가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지면서 의사소통은 점점 어려워진다. 듀이는 새로운 교통 및 통신 수단의 발달로 시공간적인 거리라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듀이는 그것이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듯하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의사소통 기술을 보유한 사회에서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듀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의사소통이란 모름지기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각자의 입장을 전달함으로써 공통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 의사소통을 하더라도 서로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을 수도 있겠으나, 의사소통의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최소한 상대의 입장에 귀 기울이고 자신과 다른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호작용의 과정이 없다면 의사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으나 의사소통의 기술이 확산되고 발전할수록 상호작용은 없어지고 일방적인 주장의 재생산만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통신기술의 발달이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아놓거나 진지한 대화보다는 막말이 난무하는 싸움터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유튜브에 올라온 가짜 뉴스는 소위 끼리끼리 모이는 ‘단톡방’을 통해서 확산된다. 패륜적인 언행을 일삼는 인터넷 사이트에는 서로 욕설을 함으로써 쾌감을 얻는 변태적인 사람들이 모여든다. 스스로 건전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자처하는 사이트는 자신들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이트를 오염시킬 것을 우려하여 성향이 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려고 애쓴다. 인터넷 사이트들은 점점 게토화되고 상호작용은 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상호작용이란 일어나지 않으며 상대를 향한 욕설과 막말이 재생산될 뿐이다. 통신기술의 발달이 가능하게 한 의사소통의 장이 지역별, 계층별, 연령별, 성별 장벽을 강화하고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

공동체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공공성을 찾고자하는 진지한 노력 대신 막말만이 인터넷 공간에 차고 넘친다. 상대방에게 저주에 가까운 막말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화합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막말을 일상적으로 듣고 있노라면 이 사회가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회의하게 되고 거기서 오는 피로감이 누적되어 정치적인 것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갖게 된다. 

우리가 공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의사소통의 장에서 품위 있는 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고상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공성을 실현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교양 없는 사람들이 욕설을 일삼고 막말을 한다고 해서 그런 말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공공성의 실현을 임무로 부여받은 정치인은 사회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모두를 위한 공동선을 도모할 의무가 있다.    

제인 애덤스의 품위

루이스 매넌드의 《메타피지컬 클럽》(정주연 역, 민음사, 2001)은 미국의 철학인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미시적으로 서술한 역작으로서 2002년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남북의 갈등 상황을 서술하면서 시작하는데 1부 첫 페이지에 실린 사진 속 인물은 노예제 지지파 주민 다섯 명을 납치하여 단검으로 머리를 갈랐던 존 브라운이라는 백인이다. 그의 과격한 행동은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이 내전으로 치닫게 된 데에는 당시 사회의 종교적, 문화적, 산업적, 정치적 갈등 요인들이 있었다.

매넌드는 프래그머티즘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남북전쟁을 전후해서 미국의 사상, 종교, 정치계에 영향을 미쳤던 인물을 조명한다. 첫 번째 장에서 그는 연방군의 장교 출신 올리버 웬들 홈스의 행적을 통해 당시에 미국 사회가 어떤 문제로 분열되고 갈등을 겪었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후에는 윌리엄 제임스, 찰스 피어스 퍼스, 존 듀이 등에 대한 매우 자세한 소개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에머슨, 아가시 등과 같은 당시의 영향력 있었던 지성이 언급되고, 다윈주의가 당시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된다. 가히 프래그머티즘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프래그머티즘은 갈등을 넘어서는 방법에 관한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적인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목격한 미국의 지성인들은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지성적인 태도를 찾아내야 했다. 프래그머티즘이 도그마에 입각해 있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원리주의자들은 갈등의 상대자와 대화하거나 타협하기보다는 상대를 제거하고자 한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철학적 관점이 진리라고 자처하는 철학은 다른 철학을 비진리라고 부정한다. 차이와 다름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프래그머티스트들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철학적 관점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른 상대방을 포용하는 프래그머티스트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존 듀이를 다루는 12장에 서술되어 있다. 듀이의 다원주의와 공공성에 대한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메난드가 택한 방법은 철도파업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다. 토목 사업가였던 조지 풀먼은 1867년 철도 열차 생산 사업에 뛰어들어 미국 최초의 기업 의존형 도시인 풀먼 시를 건설했다. 풀먼 시의 모든 것은 풀먼사 소유로서 풀먼시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은 급료에서 임대료를 원천 공제당했다. 문제는 1893년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불거졌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임금을 삭감 당했으며, 높은 임대료를 물어야 했다. 풀먼 노동자들은 유진 데브스가 이끄는 미국철도노동조합에 요청하여 풀먼 침대차를 모든 철도회사가 보이콧하도록 했다. 이것은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이어졌고, 수 천 명의 경찰병력이 파업진압에 동원되었고, 12명이 사살되었다. 

철도노동자의 편을 들었던 대부분의 지식인들에게, ‘헐 하우스’라는 지역 사회복지 센터를 설립하여 당대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사회학자 제인 애덤스의 행보는 의아하게 여겨졌다. 제인 애덤스는 노동자들의 보이콧에 유감을 표하면서 갈등을 유발하는 적대감을 없애는 일에 매달렸다. 제인 애덤스는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공적으로 간주되었다. 듀이는 애덤스와 논쟁을 벌였고, 결국 “우리의 행위와 욕구에 대한 세상의 반대가 이익들 간의 진정한 대립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407쪽)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애덤스가 옳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애덤스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내가 당신에게 스타 양이 들려준 그들이 처음 겪었던 일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구려. 야유, 창으로 날아드는 돌, 그리고 다른 모든 소동들과 더불어, 애덤스 양이 경찰을 부르기보다는 그냥 내버려 두겠다고 말했던 자초지종 말이오. 어느 날 한 흑인이 거리에서 그녀의 뺨을 쳤고 그녀는 그냥 뺨을 문지르고는 모른 체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하오.”(407-408쪽)

애덤스의 이런 행보는 사태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풀먼 사태를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으로 간주하고 한 쪽 진영에 가담하여 투쟁하고자 했을 때 애덤스는 그 대립이 단지 한편의 이익이 다른 한편의 손실을 의미한다고 믿는데서 오는 오해일 뿐이며, 공동의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에 불과하다고 여겼다.(409쪽)

자신의 진영이 옳다고 믿는 것이 때로는 반민주주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메넌드는 진정으로 옳은 것은 민주적으로 도달된 결과라고 말한다.(410쪽) 그 결과는 내가 옳음을 선점하거나 전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과의 소통을 통해서 합의에 도달할 때만 도달할 수 있다. 메넌드의 이런 언급은 공공성과 공동선을 지향하는 프래그머티즘의 다원주의적 입장을 잘 요약해 보여준다. 

우리는 온오프라인에서 늘 상대진영의 뺨을 때리는 상황을 마주친다. 제인 애덤스라면 모른 체하고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런 품위 있는 행동들이 ‘옳음’을 만들어낼 것이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