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른의 행복은 아이에게 달려 있나 봅니다 / 오승주 작가

고서연, 배정현, 이아인, 현혜준 어린이가 합동으로 만든 '라푼젤'은 참외 껍질과 머리와 다리를, 감귤 껍질로 라푼젤의 긴 머리를 표현했고 풀에 글자를 새겨 마른 흙모래를 부어 글자를 새겼습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고서연, 배정현, 이아인, 현혜준 어린이가 합동으로 만든 '라푼젤'은 참외 껍질과 머리와 다리를, 감귤 껍질로 라푼젤의 긴 머리를 표현했고 풀에 글자를 새겨 마른 흙모래를 부어 글자를 새겼습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첫째 날, 자연 그리기 놀이수업

“광령초에 하나뿐인 요정이에요.”
“해파리 요정은 해파리를 조종할 수 있어요.”
“고구마 껍질로 만든 고구마 요정은요. 화가 나면 맛 없는 고구마가 나오고요. 
기분 좋으면 맛있는 고구마가 나와요.”
“사무라이 요정이 칼 연습을 할 때 감자 요정이 감자 칼을 던져줘요.”

담이 없는 광령초등학교 쉼터에서 교실로 쓸 만한 데크를 빗자루로 쓸고나니 멀리서 스무 명 남짓 어린이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재잘대는 아이들, 뛰어오는 아이들, 장난치는 아이들, 큰 소리로 웃는 아이들, 대견하게 선생님과 함께 짐을 들고 오는 아이들의 표정은 비온 다음날처럼 맑았습니다. 6월 12일과 13일 광령초등학교는 오전 수업시간 ‘아주 특별한 야외수업’을 열었습니다. 

교실에서 볼 때보다, 도서관에서 볼 때보다 아이들의 표정이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건 아마도 아이들이 자연을 닮아서일 것입니다. 첫째 날은 2학년 3개 반 어린이들과 ‘자연그리기 놀이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전날 학부모님들께 문자메시지로 정성스레 안내를 해주셔서 아이들의 손에 든 비닐에는 병뚜껑, 단추, 감귤껍질이 수북했습니다. 한 친구는 죄다 양파껍질, 마늘껍질이어서 친구들은 코를 막고 ‘역대 최강’이라고 말했습니다. 병뚜껑을 풀로 붙여서 얼굴을 그리고, 양파 껍질과 감귤껍질을 투명테이프로 붙여서 머리카락을 만들었습니다. 단추, 나뭇가지, 나뭇잎 등 다양한 물건들도 저마다의 역할을 하면서 사용됐습니다.

강준형 어린이의 '강철기계'는 다 쓴 물티슈 통을 몸통으로 하고 와인 뚜껑으로 배터리를 표현했습니다. 강철기계가 화가 나면 뚜껑을 열고 배터리를 빼면 지구상 모든 생명체가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강준형 어린이의 '강철기계'는 다 쓴 물티슈 통을 몸통으로 하고 와인 뚜껑으로 배터리를 표현했습니다. 강철기계가 화가 나면 뚜껑을 열고 배터리를 빼면 지구상 모든 생명체가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차도에서 바위로 된 낮은 경계를 지나 커다란 나무 아래 마련된 데크를 교실로 삼아서 학생들이 맘껏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나가던 동네 어르신들과 학교 일을 하시는 분들이 한참 구경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차도에서 바위로 된 낮은 경계를 지나 커다란 나무 아래 마련된 데크를 교실로 삼아서 학생들이 맘껏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나가던 동네 어르신들과 학교 일을 하시는 분들이 한참 구경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정크 아트(junk art)를 활용한 그림책 <누구세요?>(북극곰)를 낭독해주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이탈리아의 천재 그림책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가 못쓰는 삽, 펜치, 톱, 망치 등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고 스토리를 만든 데에 놀이를 얹은 것이 ‘자연 그리기 놀이’입니다. 못 쓰는 물건에 자연물을 더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어린이가 발 닿고 손닿는 모든 곳에 있는 물건들이 예술의 재료가 된다는 건 세상의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관찰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놀이에 담긴 뜻을 온몸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필기도구를 못 챙겨 와서 스케치북에 제목과 이름을 쓸 수 없었습니다. 한 친구가 선생님의 지시로 교실로 달려갔지만 그새를 참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풀로 이름을 쓰고 마른 흙모래를 뿌려서 글자를 새겼습니다. 재료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거운 그림그리기 시간이었습니다. 애써 자연을 모아 왔지만 아이들이야말로 최고의 자연입니다. 

재료가 좀 부족한 친구들은 운동장을 거닐며 쓸 만한 재료를 모았습니다. 재료를 모으러 다니면서 바위 넘기도 하고 또 장난을 치다가 선생님께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더니 제게 대뜸 “선생님 개미 죽여서 붙여도 되나요?”라는 질문으로 놀라게 합니다. “이 그림은 버려진 물건, 땅에 떨어진 식물, 죽은 것들을 써야 하고 살아 있는 것은 사용하지 않는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풀을 뽑아 붙이려는 아이들과 나뭇가지를 꺾으려던 아이들이 하던 일을 멈췄습니다. 

아이들에게 첫 번째 수업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재료를 모으러 돌아다녔던 일, 스케치북에 붙이는 일, 그림 그리는 일 등을 말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대답은 “상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상상의 즐거움을 맛보았다니 흐뭇했습니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출신 채창환 코치님이 타격 자세를 꼼꼼하게 체크해주셨습니다. 코치님은 야구 근육으로 제대로 된 폼을 보여줬던 어린이가 2학년 1반에 4명 등 2학년 전체에서 10명 가까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출신 채창환 코치님이 타격 자세를 꼼꼼하게 체크해주셨습니다. 코치님은 야구 근육으로 제대로 된 폼을 보여줬던 어린이가 2학년 1반에 4명 등 2학년 전체에서 10명 가까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둘째 날, 야구 특별 수업

이튿날은 야구 특별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몇 분의 학부모님들이 보조를 해주셨고 학교에서는 티볼과 글러브 등을 준비했습니다. 왼손잡이는 왼손잡이용,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잡이용 글로브에 손가락을 끼우면 되는데, 아이들은 처음에는 손가락을 어디에 끼워야 하냐며 마구 물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난감해 한참을 헤매자 스스로 끼우더군요.

프로야구 출신의 코치님은 캐치볼을 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방법이 낯선 아이들은 처음에는 힘없이 공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공을 땅으로 패대기치는 아이, 엉뚱한 방향으로 던지는 아이, 공을 잡으러 달려가는 아이, 자기 공이라고 다투는 아이, 못 하겠다고 떼쓰는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놀았습니다. 코치님은 캐치볼보다는 실전 야구 게임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야구 코치님은 1반에 야구 근육을 쓰는 학생이 네 명이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캐치볼 몇 번과 공격, 수비 한두 번 했던 짧은 시간 동안 장인의 눈썰미가 작동했던 것입니다. 아마 코치님이 말했던 그 아이들도 느낌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광령초등학교의 아주 특별한 야외수업은 유소년 야구단 모임을 함께 하는 몇몇 학부모님들이 의기투합해서 추진되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시골학교에서는 친환경 급식을 제공하는 학부모의 농장을 찾아가 배우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살아 있는 지식을 배울 수도 있고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출신 채창환 코치님이 가르쳐준 동작대로 공을 던지려고 집중하는 광령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출신 채창환 코치님이 가르쳐준 동작대로 공을 던지려고 집중하는 광령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우리나라도 재주 많은 학부모님들이 학교 수업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제 아이는 전날부터 무척 설레더군요. 아빠의 수업이 매우 특별했던 모양입니다. 친구들 앞에서 자랑스러워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면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편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도 있습니다. 1회성 수업이 아이들 삶에 어떤 보탬이 될 수 있을까? 다시 일상이 찾아오면 오늘의 기억은 묻히고 말 테니까요. 언제나 배부를 수 없는 게 ‘첫술’이기에 1회성 수업은 언제나 진한 아쉬움을 남깁니다. 수업이 끝나고 도구를 챙기려는데 서너 명의 아이들이 제 앞에 와서 섭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습니다. 

“선생님, 기억할게요.”
“저도요.”

아이들의 말을 들었을 때 방금 전까지 아쉬웠던 첫술은 어느새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어른의 행복은 아이에게 달려있나 봐요. / 오승주(작가, 광령초 2학년 오민서 학부모)

놀이에는 놀이설명서(튜토리얼)가 있습니다. 자연그리기 놀이의 튜토리얼은 이탈리아 천재 그림책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의 '누구세요?'입니다. 글자의 크기를 조절하며 낸 이미지 효과를 퀴즈로 재구성하여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습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놀이에는 놀이설명서(튜토리얼)가 있습니다. 자연그리기 놀이의 튜토리얼은 이탈리아 천재 그림책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의 '누구세요?'입니다. 글자의 크기를 조절하며 낸 이미지 효과를 퀴즈로 재구성하여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습니다. /사진 제공=광령초등학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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