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파수꾼 낭독극 ‘변질’

6월 30일 극단 파수꾼이 낭독극 '변질'을 마치고 난 뒤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6월 30일 극단 파수꾼이 낭독극 '변질'을 마치고 난 뒤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우리는 1년이란 시간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새 생명이 태어나 처음 조우하는 환경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축하하는 기준도 바로 1년이다. 그 축하 속에는 사시사철을 한 번씩 지나면서 잘 버틴다면 다음, 다다음 이상의 365일도 잘 버티겠거니 하는 바람이 담겨있지 않을까.

6월 30일 정기공연 겸 창단기념회 자리를 연 제주 극단 ‘파수꾼’(대표 조성진)의 마음도 비슷하리라 본다. 파수꾼이 창단 1년을 기념하면서 고른 작품은 <변질>이다. 이 작품은 지난해 12월 1일 KBS라디오 ‘순수 창작 문예 드라마’ 프로그램 <무대>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극본은 양지수가 썼다. 

파수꾼의 <변질>은 KBS라디오 작품과 유사한 낭독극이다. 배우들은 준비한 대본을 정성스레 읽으며 때로는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했다. 

<변질>은 한 중년 남자 배우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운 좋게 방송국 공채 탤런트에 합격해 ‘직업’ 배우로 활동해온 강영우(배우 고승용). 젊어서는 친구·남동생 역, 지금은 삼촌이나 아버지 같은 밋밋한 배역으로 TV 드라마 연속극에 근근이 출연하며 가늘고 긴 배우의 길을 걷는 도중, 한 영화감독으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는다. 20대 젊은 나이임에도 “평범한 영화를 찍는 사람은 아닌” 뚜렷한 개성으로 국제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는 채인준(고재훈).

<변질>은 흔한 말로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채인준의 무자비한 영화 촬영 작업 속에 강영우가 ‘변질’돼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채인준은 마치 하얀 백지를 검게 물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시나리오 집필 단계부터 강영우를 염두했다. 껍데기를 깨버리고 싶다는 다짐처럼 채인준은 촬영장에서 강영우를 거칠게 몰아붙인다. 정체불명 괴성을 포효하는 악마·외계인 역할을 요구하면서 수십 차례 NG를 반복하고, 대본에도 없는 알몸 연기를 다짜고짜 요구하며, 분노 연기에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는 이유로 배우의 뺨을 거침없이 갈긴다. 

연기 인생에서 처음 겪는 수치와 수모. 그럼에도 원치 않는 촬영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비참함. 강영우는 어느새 자신 내면에 자리 잡은 악마·외계인, 그리고 예전 내 모습이 뒤엉키며 혼란에 빠진다. “나는 변질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심각한 고민은 시사회장을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마음뿐만 아니라, 그를 바다에 투신하게 만들 정도로 압박한다.

<변질>은 밋밋하게 살아온 한 개인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친 삶의 굴곡을 만나면서 겪는 고뇌를 ‘영화계, 배우’라는 영역을 빌려 이야기한다. 불합리한 대우를 감수하면서도 화려한 인기와 명예를 얻고 싶은 연예계의 이면을 고발하는 메시지도 강하게 묻어난다. “뒤끝은 없다”는 말로 포장하지만 결과물을 위해서라면 과정은 어떻게라도 상관없다는 채인준의 태도는 결과지상주의와 갑질 문화를 비판한다.

파수꾼의 무대에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강영우가 한참 어린 감독에게 뺨을 맞고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장면이다. 라디오에서는 효과음을 삽입했지만, 오프라인 낭독극은 고민해야 할 것이 많다. 실천으로 옮기면 배우 부담이 크고, 효과음으로 처리하면 실감나는 연기가 어렵다.

파수꾼의 선택은 전자였다. 채인준 역의 배우 고재훈은 강영우를 연기한 고승용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순간, 극장 속 관객들은 외마디 탄성을 자아냈다. 두 배우의 나이도 배역과 비슷해 연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파수꾼은 원작에서 없는 대사를 삽입하는 등 몇몇 부분을 수정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연기까지 소화하고 모든 촬영 일정을 마친 강영우의 ‘팔 다리가 잘린 것 같다’, ‘스너프 필름’, ‘내가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추가 대사는 다소 투박하지만 인물이 겪는 불안감을 더 크게 증폭시켰다. ‘오컬트 영화’, ‘SF영화를 보며 반추한다’는 대사 역시 관객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됐는데 어색하지 않았다.

출연 배우들의 목소리는 원작 성우들의 느낌을 잘 살려냈다. 부단한 연습과 노력이 뒤따랐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전문 성우와 비교하면 발성의 차이가 있지만 작품을 감상하기에 문제 없었다. 낭독극이라는 색다른 장르를 만난 낯선 즐거움도 함께 느꼈다. 

다만, 대사가 없지만 이야기 진행과 연관있는 배우들의 표정·동작 등 일명 ‘비언어 연기’는 배우마다 차이가 커 아쉬움이 남는다. 고통까지 감내한 연기와 감정 폭발의 열연을 마다하지 않은 고승용은 주인공으로서 제 역할을 소화했다. 극 말미 훌쩍이는 소리가 수차례 반복돼 옥에 티로 남았지만, 앞선 '수난'을 고려하면 한편 이해가 된다.

파수꾼의 1주년 행사는 제주시 남문사거리 낡은 빌딩 3층에 차린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열렸다. 개척교회 예배당을 연상케 할 만큼 내부는 작았지만, 많은 제주 예술인들이 방문해 격려를 보내며 훈훈한 분위기였다.

극단 대표이자 <변질> 기획·연출을 맡은 조성진은 “무대에는 연기 경험이 처음인 배우도 있다. 앞으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주력하겠다. 더 좋은 공연으로 찾아 뵙겠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또 “마라톤에 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발걸음이 멈추지 않고 더 빠르고 단단하게 나아갈 수 있길 관객의 한 명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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