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이어도 연극 ‘원위치’

우리네 현실을 보여주는 말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렵다’가 있다. 모두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 같아도 말 못할 사연 한 두 개 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크고 작은 사연들을 고려하면, 거창하지 않아도 제 때 관혼상제 치르는 정도의 평범한 삶이 사실 제일 평범하지 않다는 의미다.

제주 극단 이어도가 13~14일 선보인 창작 연극 <원위치>는 평범, 그리고 행복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손녀로 추정되는) 보리, 하리(배우 강명숙)와 시골 마을에서 함께 사는 할매(김정희). 그에게는 비밀 하나가 있다. 어느 날 시름시름 앓던 보리가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자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에 통곡하며 땅에 묻어 버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리에 대한 기억은 잊어버릴 수 없다.

시간이 얼마 지나, 집 앞 물가에서 어느 아이가 떠내려 온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기억까지 잃어버린 아이를 구해서 딸처럼 돌본다. 할매는 그 아이(고수연)에게 보리 이름을 붙인다. 어느덧 할매는 보리와 하리 이름도 헷갈려 부르는 치매를 앓고, 보리와 하리는 성년이 됐다. 그리고 기억이 돌아온 보리는 자신의 과거를 조우하러 나선다.

작품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전개 속에 보리와 할매가 갈등의 중심이다. 보리는 일찌감치 기억이 돌아왔지만 선뜻 하리·할매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친부모는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학대했었고, 참다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물에 뛰어들었는데 할매 손에 목숨을 건졌다. 할매가 자신 때문에 납치 혐의, 더불어 故 보리로 인한 사체 유기 혐의까지 더해 처벌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 알고 지내던 경찰 소장 윤필주(김병택)에게 도움을 구하는 등 발 벗고 나선다. 할매는 생계 때문에 故 보리를 돌보지 못했고 결국 자기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치매로 인해 점점 머릿속이 지워져도 이 감정과 기억만은 또렷하게 남아 자신을 괴롭힌다.

보리와 할매 모두 작품 제목처럼 본인이 발 딛고 살아갈 원위치가 어딘지 혼란스러워한다. 특히 보리는 ‘원위치’에서 외면당해 새로운 ‘원위치’를 찾았고 새 안식처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한다. “내가 어울리게 서 있는 것일까. 그것만 고민했다”, “내게 과분한 행복이었다. 그 행복과 사랑은 진짜 내 것이었다”는 토로는 보리의 마음을 함축적으로 잘 드러낸다. 할매는 가족이란 원위치를 자신이 깨뜨렸다는 일종의 자책감을 내내 안고 있다. 이런 보리와 할매를 지켜보는 하리는 두 사람을 연결하면서 동시에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이다.

할매, 보리, 하리 가족은 자칫 서로 엇나가며 망가질 수 있는 불완전한 관계다. 지난 아픔이 현재의 고통으로 커질 수 있지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잊지 않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왔고 또 의지하는 ‘지금’을 소중히 대한다. 학대, 폭력, 가난으로 고통 받았지만 소중한 인연과 부대끼며 주고받는 온정이, 거친 세상을 살게 하는 동력원이 된다는 사실을 세 사람은 몸소 보여준다. 연출자 송정혜는 <원위치>에 대해 “멀고, 쓸쓸한 시간들을 건너서 서로의 자리를, 우리의 위치를 비로소 긍정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13일 오후 7시 공연을 마친 '원위치' 출연진들. ⓒ제주의소리
13일 오후 7시 공연을 마친 '원위치' 출연진들. ⓒ제주의소리

배역에 알맞은 배우 구성은 인상적이다. 순박한 느낌으로 사연의 중심에 선 보리, 무심한 듯 속 깊은 하리, 철딱서니 없는 성격으로 분위기를 중화시키는 분애씨(이선숙),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는 건 그 만큼 배역에 녹아들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할매 모두 캐릭터와 배우의 이미지가 적절히 어울렸다. 법 너머 인간다움을 잘 알고 있는 진중한 윤필주 소장과 철없는 젊은 경찰 오소록(정승록)은 서로가 성격·역할을 보완하는 관계다.

<원위치>는 가슴 먹먹한 메시지에 더해 꼼꼼한 조명 연출, 아기자기한 소극장의 묘미를 느끼는 무대 장치가 돋보인다. 정적인 분위기를 더욱 흔드는 대사와 연출, 진부하게 느껴지는 몇몇 장면들에 대한 고민은 마저 필요해 보인다. 세상 물정 모르고 어렵게 사는 노인이라고 하나 어린 아이를 병원이 아닌 직접 매장한다는 설정은 곧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번 작품은 지난 2월 <몽골 익스프레스> 이후 5개월 만에 선보이는 이어도의 창작 신작이다. 20개에 달하는 도내 중견·신진 극단 모두를 포함해 이어도는 ‘창작’에 대한 고민을 의미 있게 이어가는 극단 가운데 하나다. 검증된 재현극을 소개하는 만큼 꾸준히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려 힘쓰고, 그것을 무대 위에 온전히 재현하기 위해 배우·제작진 역량을 키워나가는 극단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새 이야기가 제주의 '현실'을 조명한다면 더욱 반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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