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28. 뱃길과 아깃길

* 뱃질 : 뱃길
구개음화 현상으로 길→질 (예 : 길다→ 질다, 뱀→진 것)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절해고도다. 지금은 하늘길 뱃길이 원활해 물리적인 거리가 엄청나게 단축됐다.

하늘길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붐비는 게 서울-제주 노선이란 통계가 있다. 지난 4월 영국 항공교통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이 노선을 오고간 운향 횟수는 7만 9460회였다고 한다. 매일 210편의 비행기가 오고간 것이 된다. 5~10분 간격으로 뜨고 내렸다는 얘기가 된다.
 
바닷길 또한 탁 뚫렸다. 호화여객선에다 쾌속이다. 제주-부산, 제주-목포, 제주-완도, 제주-여수로 뻔질나게 오가고 있으며, 오가는 여객선 이름만 들어도 매력적이다. 실버 클라우드, 한일 레드펄, 퀸 메리, 뉴스타, 산타루치아, 골드 스텔라, 한일 블루 나래, 아리온 제주. 옛날 군함을 개조했던 ‘이리호’, ‘평택호’가 생각난다. 녹슨 흔적이 있는데도 야릇한 냄새가 나고 객실에서 파도에 부대껴 심하게 구토하던 일, 이게 섬사람의 운명인가 했었다.
 
비행기 타고 서울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불과 50분. 그러니 제주는 그야말로 옛날 제주가 아니다. 말만 섬이지 교통이 확 트였다. 오히려 서울 사람들이 비행기 탄다고 공항에 오면 수속을 밟을 줄 몰라 허둥댄다. ‘서울 촌놈’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제주도는 새로 태어나 이제 관중이 됐다. 격세지감을 맛보게 된다.
 
한데 예전에 제주에서 육지를 가려면 범선에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야 했다. 풍파속의 아득한 길이었다. 도중 강풍이라도 만나는 날엔 그 먼 뱃길을 풍랑에 휩쓸리다 수중고혼이 되거나 표류해 떠내려가는 일이 잦았다. 더 말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하게 되고 마는 경우가 많았으니, 제주도는 운명의 섬이고, 중죄인들이 귀양살이하던 형벌의 땅이었다.

섬사람들은 자급자족할 수가 없었다. 쉬운 예로 소금을 구하려면 육지 나들이를 해야만 했다. 목재다 철재다 필수품들을 사들여야 하므로 그 험한 격랑의 바닷길을 헤치고 가야 했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야 하는 목숨을 건 행로였다. 그것도 왕복해야 하는 길이니, 얼마나 노심초사했을 것인가. 그래서 ‘뱃질’이라 했다.

임산부가 출산할 때는 참기 힘든 산통(産痛)을 거치는 가운데, 숨이 탁탁 막히는 순간순간을 넘겨야 한다. 지옥을 몇 번 갔다 왔다 하는 고통을 몸으로 때운다. ‘애기 날 땐 한올이 새롭다’고 했다. 얼마나 긴박했으면 이렇게 표현했을 것인가. 산부의 고통을 덜어 준다고 남편이 곁에서 거든다는 협력출산이 나오게도 됐다.

산모가 겪는 출산의 시간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진통의 순간이 줄어드니, 그만큼 한 올에 지나지 않은 그 찰나의 순간도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함이다.

지옥을 몇 번 갔다 왔다 하는 고통을 몸으로 때운다. ‘애기 날 땐 한올이 새롭다’고 했다. 얼마나 긴박했으면 이렇게 표현했을 것인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옥을 몇 번 갔다 왔다 하는 고통을 몸으로 때운다. ‘애기 날 땐 한올이 새롭다’고 했다. 얼마나 긴박했으면 이렇게 표현했을 것인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뱃길과 아깃길.’

항해의 위험성과 출산의 고통스러움을 결부지어 표현의 묘미를 살렸다. 그럴싸하다. 말을 맛깔스럽게 다루는 솜씨가 여간 아니지 않은가. 놀라운 언어구사력이란 생각이 든다.

‘뱃질과 애깃질.’

전혀 다를 것 같은 두 현상이 속담이라는 하나의 구조에 녹여 ‘일의 위험천만함이나 일을 치르는 과정의 아픔’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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