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술공간 오이 연극 ‘청혼&곰’

연극 애호가들에게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겸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1860.1~1904.7)는 무척 익숙한 이름이다. 이전처럼 그래왔듯, 지금도 전국의 무수한 고등학교·대학교 연극 동아리와 극단들이 안톤 체호프가 남긴 유산을 읽고 무대 위에 올린다. 

체호프는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톨스토이

정경, 인물 간의 대화를 체호프만큼 생생하게 전달한 작가는 없었다.
서머싯 몸

그가 어떤 존재인지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평가를 통해 손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제주에서 가장 다양한 색깔의 연극을 시도하는 극단으로 평가받는 ‘예술공간 오이’(공동대표 오상운, 전혁준)가 3개월 만에 신작을 들고 왔다. 바로 안톤 체호프의 단막극 <청혼&곰>이다. 

<청혼>의 발표 시기는 1889년, <곰>은 1888년이다. 그의 나이 28~29세. 안톤 체호프가 모스크바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시기가 1884년,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푸쉬킨 상을 수상한 때가 1887년이다. 고로 두 작품은 비교적 초기 작품이지만 작가로서의 역량이 정점으로 향하는 시점에 발표됐다고 어설프게 짐작해볼 수 있다.

<청혼>은 젊은 지주 로모프(배우 김현준), 노처녀 나딸리아(한정임), 나딸리아의 아버지 추브꼬프(현대영) 세 사람의 이야기다. 나딸리아에게 청혼하기 위해 자택을 찾아온 로모프. 다행이 부녀가 모두 반기면서 별 다른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두 집안 토지 사이에 걸친 땅이 누구 소유인지 공방을 벌이면서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간다.

<곰>도 퇴역 육군 포병 중위이자 지주인 스미르노프(현대영), 7개월 째 상복을 입고 은둔 중인 젊은 미망인 뽀뽀바(김민경)와 늙은 하인 루까(김지은)까지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자를 갚기 위해 급한 돈이 필요한 스미르노프는 뽀뽀바를 찾아가 죽은 남편에게 받을 돈이 있다고 재촉한다. 당장은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여인과 받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두 사람 사이는 급기야 결투까지 이어진다.

앞서 언급한대로 안톤 체호프가 남긴 희곡은 지금까지 무수한 사랑을 받아왔다. <청혼>과 <곰> 역시 마찬가지. 최근 국내 극단들이 다룬 <청혼>, <곰>을 보면 유사한 흐름이 보이는데, 주로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그려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출판한 《체호프 희곡 전집》(시공사)에서도 ‘희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청혼), ‘전형적인 오락 희극’(곰)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예술공간 오이의 <청혼&곰>은 사뭇 달랐다. 웃음기를 뺀 치명적이면서 처절하기까지 한 매혹적인 사랑으로 접근했고, 연출에서는 곱씹을 수 있는 즐거운 생각거리를 안겨줬다. 

일단 <청혼>은 ‘코미디’라는 보통의 흐름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노처녀 딸을 드디어 시집보낼 수 있어 기쁜 아버지와 평소 호감을 가지던 남자에게 고백받는다는 사실이 반가운 딸.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한다는 기대를 품은 남자. 세 사람이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는 극 초반이 어느새 멱살을 잡고 뒤통수를 갈기는 ‘전투’로 뒤바뀌는 전개는 웃음을 유발한다. 아버지가 전쟁터 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떡실신’이 된 청년과 딸을 일으켜 부랴부랴 결혼시키는 장면은 실소를 금치 못한다. 행복과 불행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달라진다는 ‘인생의 진리’도 웃음 속에 슬쩍 끼워져 있다. 

유쾌하게 정신없이 몰아치는 첫 무대를 지나고 난 뒤, 다음 무대는 전혀 다른 농도를 가지고 관객 앞에 선다. 출연진들은 극이 다른 분위기로 전환됨을 암시하듯 암전 속에서 기립한다. 

집안을 온통 자신의 그림으로 채우며 7개월 째 집안에서 나오지 않는 젊은 과부. 그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는 빚 때문에 감정이 고조돼 있는 남자다. 두 사람의 충돌은 주고받아야 할 돈에서 시작해 여자에 대한 실망과 분노, 남편에 대한 순종적 사랑과 배신이라는 자기 고백으로 번진다. 결국 서로 총까지 들고 대결하는 상황에서 남자는 앞선 21번의 만남과 이별에서 느끼지 못한 감정을 발견하고 사랑 고백을 한다. 난데없는 고백 공격에 여인은 몹시 혼란스러워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겪는 떨림 때문인지 어둠 속에서 남자 품에 안긴다.

로맨틱 코미디로 풀어낸 극단들의 여러 시도와 전형적인 오락 희극이란 책 소개를 무색케 하듯, 예술공간 오이의 <곰>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물드는 남녀의 처절함이 돋보인다. 극단적인 분노와 감정 소모, 나아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증오. 그러나 비로소 “불꽃같은 진짜 여자”를 찾았다는 남자의 사정없는 구애와 남자를 내보낼 수도 잡을 수도 없이 혼란스러운 여인. 앞선 <청혼>의 혼잡함과 모순 속에는 유쾌한 느낌이 담겨있다면, <곰>의 경우는 흡사 격렬한 치정극에서 느낄 만 한 그것이 배어있다. 치열함을 지나온 극단(極端)에서 서로에게 끌리는 스미르노프와 뽀뽀바의 사랑은 매혹적이면서 끈적이게 관객을 매료시킨다. 

28일 오후 3시 공연을 마친 '청혼-곰' 출연진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의소리
28일 오후 3시 공연을 마친 '청혼-곰' 출연진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의소리

예술공간 오이의 <청혼&곰>은 무대 세트, 조명, 연출에서도 인상적인 시도들을 남겼다. <청혼>은 원작 줄거리와 러시아라는 배경, 인물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무대는 지극히 한국적인 느낌으로 제작했다. 미닫이문에서 보던 전통무늬 패턴, 세로로 적힌 냉콩국수 글자, 난초 등으로 채워진 무대는, 사랑 다툼이란 소재와 어우러져 흡사 90년대 주말 가족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전통무늬 패턴 배경을 사용한 조명 활용도 새롭게 다가왔다.

<곰>에서는 더욱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무대 구성과 변화에 있어 제작진의 상당한 고민이 느껴졌다. <청혼>에서 <곰>으로 넘어가면서 무대 장치를 대대적으로 바꾸는데 블록버스터 음악에 맞춰 한 번에 들어 올리고, 커다란 눈동자·나비·유니콘 등 어두운 판타지를 연상케 하는 그림들로 가득 채운 무대, 줄거리 전개에서도 중요한 매우 파격적인 무대 전환 등등은 관객 예상을 뛰어넘는다.

남녀 주인공의 동선은 작품의 디테일을 더욱 살린다. 스미르노프와 뽀뽀바는 논쟁을 벌일 때나 결투 장면에서 일직선상으로 바라보며 대치하는 동선을 유지하는데, 이런 구도는 긴장감을 끌고 가는데 효과적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은 한동안 마주보는 시선을 유지하면서, 조명은 일정한 패턴으로 색을 변화한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조명의 변화는 남녀에게 닥칠 사건을 암시해주는 동시에 묘한 감정을 주고받는 상상까지 가능하게 만들어 깊은 인상을 준다. <곰>은 흥미로운 구석들이 작품 곳곳에 더 숨어있다. 러시아 과부 뽀뽀바가 남편을 추모하는 방식은 한국 무속 문화를 떠올리게 하고, 전직 장교라는 설정을 고려했는지 스미르노프가 신고 온 해병대 ‘세무워커’는 꼼꼼한 재치다. 

현대영은 <청혼>에서 아버지 추브꼬프, <곰>에서 전직 장교 스미르노프, 그리고 연출자로 1인 3역을 소화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 ‘딸의 결혼’이란 숙원을 해결하려는 아버지, 여성에 분노하면서 주체하지 못하는 사랑에 솔직해진 남성을 소화했다. 고혹적인 매력을 뽐내는 뽀뽀바 역의 김민경은 자신을 배신한 사랑에 결규하며 이내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는 복잡한 감정을 실어 보냈다. 늙은 하인 루까 역의 김지은은 극 속에 녹아들면서 짧고 굵은 웃음을 선사한다.

자기주장이 강한 나딸리아 역의 한정임과 왜소한 로모프 역의 김현준은 밀고 당기는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이미지 조합이다. 풋풋한 매력을 느꼈지만, 종종 교과서 낭독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김현준은 <청혼>으로 연극배우에 데뷔했다. 

결혼이란 소재를 두고 치고받으면서 풀어가는 <청혼>은 흡사 영화 <위험한 상견례>(2011)가 생각났다. 남녀가 상황과 다르게 서로에게 끌리는 <곰>은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2000)를 떠올리게 했다. 방에 불이 꺼지는 연극의 마지막 순간부터 <화양연화>의 첼로 연주곡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예술공간 오이의 신작 <청혼&곰>은 서로 다른 장르가 ‘사랑’을 그리면서, 동시에 파격적인 무대 변화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고전에 대한 새롭고 도전적인 접근이 반갑다. 현대영은 이번 작품이 연출자로서 입봉작이다. 

<청혼&곰>은 7월 27일부터 8월 11일까지 매주 토·일요일 오후 3시와 7시에 공연한다. 관람료는 1만원이다.

예술공간 오이
제주시 연북로 66 지하 1층
artspace52.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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